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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로] 조선시대 화가는 미디어 매체?
[가야로] 조선시대 화가는 미디어 매체?
  • 승인 2008.10.2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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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화가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드라마로 각색된 혜원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렇고 얼마 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드라마 이산의 성송현도 도화서 화원이었다.

혜원은 단원 김홍도, 백곡 김덕신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한명이다.

섬세하고 세련된 붓질, 깔끔한 구도처리, 화려한 색체… 조신후기 천재화가였던 혜원 신윤복의 화폭을 두고 하는 현대인들의 표현이다.

하지만 혜원의 그림에는 당시 화가들이 표현하지 않았던, 아니 표현할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선 볼 수 없는 혜원만의 자유분방함이다. 혜원은 양반 중심의 체계적 문화에서 벗어나 부녀자들을 그리는 등 그림의 소재에 다변화를 꾀했다. 시골 주막의 서정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현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참된 모습을 즐겨 화폭에 담은 것이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접하면서 저 시대에는 그림이 미디어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당시는 상인계층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경제적 부를 확보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세상 정보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접하다 보면 당시 상인들의 의상은 몰락한 양반들의 그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색채감도 뛰어나다. 당시 부를 축적했던 중인계급의 상인들은 몰락양반, 또는 영향력이 미비했던 벼슬아치들보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의 씀씀이도 양반들보다 자유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의 값어치는 자금을 틀어쥔 수요자인 이들이 매겼을 것이며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입맛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이들 계층의 문화적 욕구가 신윤복과 김홍도라는 풍속화가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실제 김홍도의 그림 중에는 어느 대청마루에 웃통을 벗고 엎드려 집단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있다. 아마 그림을 거래하는 화상의 독촉에 쫓겨 황급히 그림을 생산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때의 그림은 아우라의 광휘가 넘치는 단 한편의 예술작품이었다기보다 먹고 살만한 특수계층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신윤복의 ‘청금상련’에는 대낮에 기생을 끼고 노는 양반네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김홍도의 ‘추수’에는 상민들이 추수하고 있을 때, 곰방대 물고 돗자리에 삐딱하게 누워있는 어느 양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요즘 양반들은 어떻게 지내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들이 그린 춘화는 이들이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였다기보다 세상과 그림소비자를 연결하는 메신저였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한다.

신윤복, 김홍도 등 조선후기 화가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민들에 알리는 기자였으며, 곧 미디어 매체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그림은 사진이자 영상이었으며 화폭에 한두 줄 새겨 넣은 글은 기사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풍속화가 계급적 갈등이 만연한 세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전달한 ‘사회르포’였다면, 일본의 우키요에는 연예계의 화제와 동향만을 특화해 취급하는 ‘연예전문지’였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보통 미디어의 역사는 17세기 책, 같은 세기말 신문에서 시작돼 20세기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거쳐 현대에는 인터넷, 휴대폰 등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것만 미디어였다고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초현대식 미디어에 포르노그래픽, 정치비판 등 명랑사회를 위협하는 내용들이 떠돌아다닌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에도, 일본의 우키요에에도 그런 것은 차고 넘친다.

섹스와 정치비판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이다.

정철규 진주시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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