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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출 400억 중견 프랜지ㆍ단조社 `자리매김`
연매출 400억 중견 프랜지ㆍ단조社 `자리매김`
  • 박세진
  • 승인 2012.07.1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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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강소(强小) 기업을 찾아서> 김해 대흥공업(주)

 

내수ㆍ수출 7대3… 올 일천만불 수출 전망
 "2~3년 내 기업 공개ㆍ직원에 주식 배분"

 지역경제의 근간인 중소기업. 중산층이나 서민에게 부의 분배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도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많은 중소기업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본지는 본사가 위치한 김해를 중심으로 지역경제와 산업의 다양화 기여하고 있는 도내 유망 중소기업들의 성공 스토리와 기술력을 소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고자 한다.
 또 우수한 기술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홍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들에게도 지면을 할애할 방침이다.
 앞으로 매주 1회 월요일자에 이 같은 중소기업들의 성공 스토리를 소개해 나간다.
 <편집자주>

▲ 공장 내부 전경.

 김해시 한림면 병동리 공장지대에 위치한 대흥공업(주).
 14년 업력이 무색하지 않게 연매출 400억 원을 웃도는 중견 프랜지(관 이음새), 단조회사로 자리잡았다.
 1998년 김해 어방동에서 400㎡(120평) 부지 규모의 프랜지 공장으로 출발한 대흥공업은 현재 1만2천㎡(3천700평) 부지에 프랜지와 단조사업부 4개 동, 직원 수 70여 명의 회사로 성장했다.
 외형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지난 한해만 420억 원의 매출고를 올렸다. 내수와 수출 비중은 7대 3 정도로 현대, 대우, 삼성, GS 등 대기업에 직접 납품하는 이른바 1차 밴드업체이다. 대흥공업의 기술력을 짐작할 수 있다.
 주요 수출국은 중동으로 2009년 제46회 무역의 날,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오백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 김재환 대표이사.

 김재환(53) 대표이사는 "올해는 일천만불 수출의 탑 수상도 무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 대표는 업계 영업맨 출신이다. 이러한 이력이 지금의 대기업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창업 초기에는 조선소 위주로 납품해오다 5년 전부터 플랜트 분야로 눈을 돌려 거래처를 확대했다.
 또 지난해 2월 부산의 녹산공단에서 지금의 공장으로 확장 이전해 오면서 단조사업부를 대폭 확대, 본 궤도에 올려 이전 1년 만에 매출 2배, 직원 수도 2배 늘었다.
 프랜지 제조를 위해서는 단조 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장치산업인 단조는 초기 투자비용이 많아 프랜지 제조사는 단조사업부를 갖추지 못한 영세 소기업이 많다.
 대흥공업이 다른 프랜지 제조사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부전자전
 김 대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부친을 꼽았다. 고향 통영에서 수산업을 크게 한 부친 덕에 김 대표는 남들보다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거제 쪽에 투자한 양어장 사업이 실패하면서 30년 전 김 대표 가족은 고향을 등진 채 부산으로 향했다.
 김 대표는 당시를 "방 한 칸에 일곱 식구가 생활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비록 사업에 실패하셨지만 아버지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사업 실패로 진 빚을 불과 5년 전까지 용돈을 모아 갚으신 분입니다. 주위에서도 다 놀랍니다"
 이러한 고집스러움과 책임의식을 김 대표가 그대로 물려 받았기에 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의 대흥공업을 이룬 것이다.

▲ 전 직원 단합대회.

  직원을 가족처럼
 김 대표는 뚜렷한 경영철학은 없다고 했다. 다만, 직원을 가족처럼 여긴다고 했다.
 "크게 보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주변부터 챙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직원들도 거리감 없이 형처럼 대하고 이직률도 적은 편입니다"
 이같은 김 대표의 직원 사랑 때문일까. 창업 멤버들도 이직 없이 모두 그대로 있다.
 김 대표는 2009년 이란 쪽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못해 창업 이후 최대 위기에 처했던 2010년을 제외하고는 창업 이후 줄곧 성과급을 지급하고 있다.
 또 장기 근무자에게는 자녀 교육비를 지원하고 있다.
 직원을 내 식구처럼 여기는 김 대표의 평소 신념은 창업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 경제를 소용돌이 속에 빠트린 IMF 사태가 끝나갈 무렵인 1998년 8월 김 대표는 자신이 몸 담고 있던 회사가 부도나자 뜻을 같이하는 동료 몇몇과 회사를 인수했다. `대흥`이란 회사 명칭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인생 최대의 결단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동요하는 직원들을 붙잡기 위해 김 대표는 `급여를 주지 못할 경우 자신의 아파트를 넘겨 주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공증해 직원들에게 넘겼다.
 "초창기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전 직원이 런닝바람으로 새벽 1~2시까지 일했습니다. 현장에서 뒹굴다보니 손톱 밑에 낀 기름 때를 아플 정도로 벗겨내야 했습니다"
 김 대표에게는 IMF 사태가 결국 기회가 된 셈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앞으로도 직원들과 공유하면서 다 함께 잘 살고 싶다는 김 대표.
 "올해 기업공개 컨설팅을 진행하다가 때가 아닌 것 같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2~3년 내 반드시 기업공개를 할 것입니다. 같이 한 길을 걸어온 직원들에게 주식을 배분해 주주로서 책임감도 주고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싶습니다"
<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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