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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대부 주택 전형… 옛것 고스란히 간직
조선후기 사대부 주택 전형… 옛것 고스란히 간직
  • 형남현 기자
  • 승인 2013.02.06 2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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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고택을 거닐다] 거창 동계 정온선생 가옥

인조가 내린 정려 현판ㆍ솟을대문이 반겨
사랑채 마당 원형화단서 계절 변화 느껴

  문화재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 205호
△주소: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덕유산 남쪽 끝 금원산에서 흘러내린 산상천을 따라 위천에 이르면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번지에 조선시대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한 본관 초계(草溪),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이 나온다.
 정온 선생은 광해군에게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장작불을 지펴 열기로 죽이는 방법)한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인조 때 발발한 병자호란 이후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가 이뤄지자 낙향했다. `덕변록(德辨錄)`과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했고, 문집으로는 `동계문집(桐溪文集)`이 있다.
 정온 선생은 함양(咸陽)의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바로 옆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됐다. 유명한 서원 두 군데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경우도 드문 경우로 고건축 답사를 가게 된다면 꼭 들러볼 일이다. 동계고택은 위천면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면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면 산 아래 커다란 기와집이 나타난다.
 세월을 알리기라도 하듯 나이 많은 거대한 고목이 고택 뒤쪽에 서 있어 답사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을 앞길을 걸어 대문 앞에 다다르면 하마석이 있고 대문에는 인조가 내린 정려(旌閭) 현판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과 `국태민안룒國泰民安)`이 솟을대문에 걸려 있다.
 정온댁과 동일한 크기의 솟을 대문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밖으로 창문이 없는 것과 한쪽은 창문을 칸칸이 둬 두 건물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볼거리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들어서면 사랑채 마당은 중앙에 원형의 화단을 꾸미고 좌우 담장 아래에 각각 화단을 만들어 다양한 나무와 꽃을 골고루 심고 괴석으로 장식해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사랑채와 그 앞을 막고 서 있는 화단의 분홍색 철쭉과 붉은 장미가 피면 사랑마당은 무릉도원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꽃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의 흰 창호의 세살문, 미서기문의 문양 등은 한옥의 아름다움에 잘 어우러져 고택의 예스러움을 한껏 살려준다.
 사랑채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정면 여섯 칸, 측면은 툇마루가 붙어 있는 두 칸 반의 규모다. 동쪽 편에 `ㄱ`자로 꺾여 나온 누마루 부분이 반 칸 규모로 돼 있다.  전면은 두 칸의 온돌방과 두 칸의 마루를 꾸미고 동쪽 끝에는 영당이 자리 잡고 내루가 앞으로 나온 배치를 하고 있다. 내루 전면의 2분합 넉살무늬 불발기창은 가운데 `아(亞)`자 창틀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여름에는 삼면의 창문을 들어 올려 누마루가 되고, 날씨가 싸늘해지는 계절에는 문이 곧 벽이 되는 한옥 창문의 묘미가 나타난다. 이처럼 전통 한옥 문은 움직임과 분리가 가능해 자연스럽게 공간을 구분하고 연출할 수 있다.
 그야말로 한옥의 멋과 기능성을 조화시킨 발상은 예술적 극치를 보여준다. 아울러 내루와 연결된 본채에 마루 공간을 만들어 영당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랑채에 있는 바깥주인이 항상 조상님을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전통 미풍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안마당에는 정원과 장독대가 있는데, 장독대 주변에는 채송화와 석류꽃 등이 7~8월에 소담스럽게 핀다. 더욱이 안마당의 가장 자리를 차지한 장독대의 커다란 항아리들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고, 항아리 사이로 자그마한 단지들이 기대어 서 있는 모습에서 세심하고 넉넉한 안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곳간 중방(中枋) 아래 판벽(板壁)을 들인 곳간은 수평으로 건너지른 부재인 인방의 위치를 상하로 조절해 넌출문이 있는 출입부분과 판벽으로 돼 있는 부분의 높이와 모양을 달리했다.
 안채는 장방형으로, 잘 가공된 장대석을 두 줄을 쌓은 낮은 기단에 툇마루가 설치돼 있다. 전면 일곱 칸 중 서쪽 끝에는 두 칸의 부엌이 있는데 넌출문 위에 격자형 광창이 있다. 더욱이 여인네들이 치마를 입고 부엌에 용이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지방을 둥글게 만들었다.
 부엌 옆문으로 나오면 바로 우물이 있어 부엌살림을 하는데 편리하도록 배려해 놓았다. 이렇게 안채는 여인네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조형적으로는 부엌 널문과 상부의 넉살무늬 광창이 우아하고 단아한 모양으로 꾸며져 있으며, 판벽의 살창을 상부에 대어 채광과 통풍을 조절할 수 있도록 꾸몄다.
 온돌방의 미서기문과 머름대는 방에서 쉬고 있는 여인들의 행동을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와 함께 겨울의 찬 공기가 낮은 곳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치돼 있다. 안채의 온돌방 미서기문의 살 무늬는 여성스럽게 세살한 `아(亞)`자형이다. 사랑채의 단출한 `아(亞)`자형 세살문과는 짜임새의 차이를 두고 있는 점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동쪽 끝에는 건넌방이 있는데 툇마루를 조금 올린 아래에 아궁이를 만들고, 툇마루에는 간단한 난간을 뒀다. 안마당 건너 사랑채 옆으로 시선을 확보해 담 너머의 마을길까지 한눈에 보이도록 배치한 것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배치에 대한 꼼꼼한 배려는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 항상 포근하면서 밝은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쾌적한 생활의 기본이 되는 점을 한옥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 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 가옥에서도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집에서는 사당을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언덕 동편이나 서편 한쪽에 둔다. 그러나 정온 선생 댁은 안채의 바로 뒤편에 삼문을 세우고 별도의 담장으로 영역을 구분해 놓았다.
 사당은 맞배지붕 건물로 안채 바로 뒤에 있으며 안채와는 높이를 달리해 이 가옥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상을 모시는 것을 엄격하게 생각했던 조선시대 가옥 배치의 예라 볼 수 있다.  특히 사당의 문에 집관의 무사화평을 기원하는 입춘방을 붙인 모습에서 조상을 모시는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사당 삼문의 기둥은 지나치게 두껍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튼튼한 목재를 사용했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구성한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규모로 잘 다듬은 장대석을 한 줄 깔고 자연석 덤벙 주춧돌을 사용해 두리 기둥을 세웠다.
 대문 앞에 오래된 고목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있는 돌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집 말을 타고 찾아온 손님들이 말을 묶어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 옆의 나무는 주인의 용무가 끝날 때까지 하인과 말은 나무 아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모습으로 한옥은 자세히 열어서 들여다보면,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상들의 숨결로 가득하다. 형남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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