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2:01 (목)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 이진규
  • 승인 2013.04.03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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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 규 김해생명의전화 이사장
 오 헨리가 `마지막 잎새`라는 글을 썼다.

 마지막 잎새,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많이 읽혀진 글이다.

 `마지막 잎새`의 글은, 폐렴으로 죽어가는 소녀를 살리기 위해 무명의 화가가 붓을 들었다.

 담쟁이 잎새를 그린 화가는 밤새 비바람을 맞았다.

 소녀는 화가가 그린 잎새를 보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건강을 되찾았다.

 화가는 평생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없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과 노력으로 한 생명을 살리게 됐다.

 폐렴으로 죽어가는 소녀들처럼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평생 한 번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요즘 청소년들의 자살을 보면서 병으로 죽어가는 것도 아닌, 여러 요인들 중에 환경의 영향으로 죽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이 만든 환경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이다.

 그 청소년들 중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아이들도 있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청소년 자살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오늘 들려온 소식은 공부 잘하는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청소년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다. 그 글을 쓴 기자는, 그 청소년은 학교폭력을 당한 적도 없고, 학교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없는 학생이라고 한다. 덧붙이기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며,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기자는 여전히 `상담을 하는 학생 = 문제 학생`이라는 낙인이론(낙인 이론은 일탈 행동에 관한 이론이며, 1960년대에 시카고 학파에 속한 하워드 S. 베커 (Howard S. Becker)에 의해 제창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탈 행동을 단순한 사회 병리 현상으로 다뤄 온 방식과는 구별을 분명히 해, 일탈이라는 것은 행위자의 내적 특성이 아니라, 주위로부터의 낙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의 사람이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아픔으로 울고 있을 가정, 그 가정의 이야기는 옮기기가 마음 아프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의 아픔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가 보낸 SNS 메시지를 옮겨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정에서 가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세대, 뜨거운 심장은 어떻게든 식히고 머리로 하는 공부만을 칭찬하는 세대다. 가슴 따뜻한 사람이 아닌 공부 잘하는 사람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상담실에서 상담사와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 조국과 세계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함, 아니 청소년으로서 성장하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상담실에는 올 일이 없이(?), 뉴스의 헤드라인처럼 `전교 1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청소년들의 삶에 단 한 작품을 그리기를 원한다.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따르지 않고, 누구에게나 칭찬 듣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비바람에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듯이 청소년의 가슴의 도화지에 생명의 잎 새를 그릴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작품 말이다.

 세상에서 불어 닥치는 비바람은 어른인 내게도 심하게 다가온다.

 돈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비바람이 있다. 인터넷으로 게임을 만들어서 생명을 짓밟아 버리는 비바람이 있다. 일등만을 기억하는, 공부만을 최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비바람이 있다.

 그 비바람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어른, 그런 상담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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