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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갈피> ‘파과’‘오염된 국어사전’
<새 책갈피> ‘파과’‘오염된 국어사전’
  • 경남매일
  • 승인 2013.07.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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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
“모두 부서지고 물크러질 ‘파과’의 인생”
‘파과’
구병모 지음 (자음과모음… 1만 3천500원)

 앉아있는 임신부에게 상소리를 지껄이며 시비를 걸던 50대 후반의 남자가 붐비는 지하철에서 쓰러진다. 등에 깔끔한 칼자국이 났다. 말없이 추태를 지켜보던 65세 중년여인 ‘조각’의 솜씨다.

 조각은 45년 경력의 청부살인업자다. 업자들끼리는 이 일을 ‘방역’이라고 부른다. 사람 죽이는 일에 전염병 퍼지는 걸 막을 때 쓰는 용어 ‘방역’을 갖다 붙이는 걸 보면 청부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자들이다.

 소설가 구병모의 새 장편 ‘파과’에서 조각은 ‘45년간 수많은 업무를 처리해왔고 방역 대상의 대부분이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남은 가족에 대해 그 어떤 느낌도 가져본 적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176쪽). 나이를 먹어 칼 꽂을 때 손 떨리는 것 말고는 걱정이 없는, 남들 눈에도 절대 청부살인업자로는 비치지 않는 평범한 노부인이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남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정체가 들통날 것 같은 위기의 순간에 염탐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구성원을 잃은 채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한 가족을 맞닥뜨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각은 마음에 뭉클 솟은 연민을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다. 딸을 잃고 복수하려는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을 읽고, 2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쏟아져 내린 폐지를 리어카에 주워담는 노인을 도와준다.

 소설은 오래전 조각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청년 투우와의 일전으로 달려간다. 65세 할머니가 폐건물에서 콜트45 권총으로 매복한 자들의 머리를 쏘고 마침내 투우와 맞붙는다.

 소설의 제목 ‘파과’는 흠집 난 과실이란 의미의 ‘破果’일 수도 있고 여자 나이 16세를 뜻하는 ‘破瓜’일 수도 있다. 소설은 우리 모두가 부서지고 물크러지는 ‘破果’임을 받아들일 때,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모두 불행과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인생임을 받아들일 때 찾아오는 ‘破瓜’의 순간을 청부살인업자 할머니라는 이례적인 설정으로 그려낸다. 336쪽.

▲ 오염된 국어사전
‘국민의례ㆍ국위선양’은 일본말 찌꺼기
‘오염된 국어사전’
이윤옥 지음 (인물과사상사… 1만 3천원)

 국경일은 물론 학교의 입학ㆍ졸업식, 국가 주요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국민의례’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민의례’를 “국민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격식,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제국주의 당시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이 쓴 ‘오염된 국어사전’은 ‘국민의례’, ‘국위선양’, ‘동장군’, ‘단품’, ‘품절’까지 일본어가 한국어로 둔갑한 현실을 들춰냈다.

 이 소장은 ‘국민의례’가 사실은 일본 기독교단에서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만든 의식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국민의례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교단이 출정군인, 상이군인, 전몰군인과 유가족을 위해 그리고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행한 기미가요 연주, 묵념 따위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잘못 쓰이는 일본말 찌꺼기는 넘쳐난다. 우리가 흔히 쓰는 ‘국위선양’ 역시 일본말에서 온 것이다. ‘국위선양’은 일제강점기 때 미나미 지로 7대 조선 총독의 조선인 길들이기 5대 지침 가운데 하나였다.

 “신하들이 천황을 도와 국가를 지키고 황국신민을 있게 한 시조신을 위로해 일본을 만세일계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국위선양’의 골자다.

 곧 ‘국위선양’이란 일본을 세계만방에 알리자는 뜻이며 이 말을 계속 쓴다면 우리는 메이지 시대의 신민임을 자처하는 꼴이 된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저자는 이외에도 ‘유도리’나 ‘단품’, ‘다구리’와 같이 일본말 찌꺼기인 줄 뻔히 짐작하면서도 쓰는 말뿐만 아니라 ‘잉꼬부부’, ‘다대기’, ‘기합’, ‘품절’처럼 우리말인 줄로만 알고 쓰던 일본말 찌꺼기의 역사와 유래, 쓰임새를 낱낱이 밝힌다.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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