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9:33 (수)
祈雨祭(기우제)
祈雨祭(기우제)
  • 송종복
  • 승인 2013.08.27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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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 수석부회장
긴 가뭄 겪다 보면 `기우제` 올렸으면 하는…
 기우제를 용신제(龍神祭)라고도 하며, 반대말은 기청제(祈晴祭)라 한다. `삼국사기`의 신라 진평왕 50년 조에 의하면 용(龍) 그림을 그려 놓고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태종실록`, `세종실록`, `연려실기술`, `용재총화` 등에도 용(龍)이 등장하고 용에 대한 기우제 즉, 용신제를 지낸 적이 많다. 예로부터 3~4년에 한 번씩은 가뭄(旱災)이 오므로 삼국시대 이래 가뭄에 대한 기우제가 성행했다. 나라에서는 왕이 정사를 잘못해 내리는 천벌이라 해 왕 스스로가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에 옮기고, 죄인을 석방하는 일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산과 냇가에 제단을 만들어 정결히 하고 돼지ㆍ닭ㆍ술ㆍ과실ㆍ떡ㆍ밥ㆍ포 등을 제물로 제사를 지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녀의 가무도 곁들였다.

 고려시대에는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대개는 무당이 의식을 거행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렸고, 조선시대에는 종묘, 사직, 4교(郊), 종각, 모화관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심지어는 모화관의 연못가에서 용왕경의 기우칠사(祈雨七事)를 주문했다. 이는 옥에 갇힌 자와 실직자를 처리한다, 과부ㆍ고아들을 위로한다, 정부에서의 용역을 덜어준다, 현명한 사람을 거진(擧進)한다, 탐하고 사악한 것을 없앤다, 남녀를 명합(命合)하고 원한을 치유한다, 뇌물을 줄이고 가무를 금한다 등이다. 이 같은 일을 한 것을 보면 가뭄이 심하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원한이 많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지방의 기우제를 살펴보면 경주에서는 수십 명의 무녀들의 머리에 버들가지로 만든 모자를 씌우고 음란한 춤을 추게 했다. 또한 곡성, 옥구, 장성에서는 동네 부인들이 총동원돼 인근 동상에 올라가 일제히 소변을 봄으로써 비를 빌었고, 옥천에서는 아들 못 낳는 여인, 3대 과부가 된 여인에게 솥뚜껑을 씌워 물을 필사적으로 끼얹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원한이 크기 때문에 그 원한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아 이승만 정부시절(1950년대)에 전란도 많았고 가뭄도 대단했다. 메마른 논밭에 물을 길러 주느라 낮에는 웅덩이를 팠고, 밤에는 물을 길러 주느라 잠도 제대로 못잔 적이 많았다. 박정희 정권(1960년대)에는 그런대로 비가 많이 와서 농사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 후 3~4년 만에 주기적으로 가뭄이 왔다. 그럴 때마다 기우제를 지냈는데, 주로 명칭에 용 자(龍字)가 붙은 곳 즉, 용두산, 용마산, 용제봉, 용마루, 용지못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지방마다 명산에 무덤을 파헤치는 일과 또한 5일장의 장소도 옮겨갔다. 요즘에는 가뭄에도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농민들은 기우제를 아예 올릴 기미가 없으니 `용(龍)`이 노해 비를 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문화를 한 번쯤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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