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6:56 (금)
여행작가 이동근 잘지내나요 내인생
여행작가 이동근 잘지내나요 내인생
  • 이동근
  • 승인 2013.10.21 21: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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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에 겪은 남편과의 이별
상실감도 잠시 ‘엄마’로 돌아와

 깊어가는 가을, 나는 당신을 만났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그러나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끌어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자존심 하나로 살아왔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잃은 것도 많았다는 말을 힘들게 했다. 3시간 이상의 인터뷰가 끝난 후, 이제는 조금 속이 후련하다며 눈물짓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진정한 위로 라는 것은 당신을 이해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외로운 것이 어떤 ‘순간’들일까? 당신도 한 번쯤은 온몸으로 견뎌야 할 외로움 속에서 등이 시릴 만큼 외로움이 찾아올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나 홀로 벼랑 끝으로 내몰린 듯 쓸쓸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시간보다 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견뎌야 하는 순간들도 있다.

 혼자 모든 것을 참아내기에는 아직 어렸던 나이, 그녀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 새로운 인생을 다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 언제 와? 아빠는 몇 밤 자면 와?”

 딸아이가 내게 물었다.

 “응. 아빠는 백 밤만 자면 오실 거야!” 나는 딸아이가 물을 때마다 이런 말들로 거짓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골목 뒤편으로 가서 흐르는 눈물을 삼켜가며 우는 날도 수없이 많았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남편을 잃었다. 그 억겁의 세월을 견뎌오는 동안 나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다.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이 녹록지 않은 세월이었고, 어릴 적 집이 가난해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기 위해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들까지 해야만 했다.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열심히 살았지만 후회되는 것도 많다.

 나는 딸 다섯, 아들 하나를 둔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그랬을 것 같다.

 유복하지 못했기에,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해야 했고, 내 언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객지로 나가 공장 생활을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고, 나 역시 객지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명도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적응을 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내 형제들이 그리워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게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한숨과 타박뿐이었다.

 “언니들도 동생들도 잘 적응하면서 그곳에 있는데 너는 그 모양이냐?”라는 그말이 정말 내게는 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머니는 집안으로 나를 들여주지 않으셨고, 할 수 없이 친구 집 다락방에서 신세를 져야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 내가 흘린 눈물은 나를 모질게 대하는 가족을 향한 원망이 담긴 눈물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께서 나를 감싸 주셨다.

 “집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닌데 너무 야속하게 구박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신 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집안일을 도와 가며 어느덧 결혼해야 할 혼기가 가득찼고, 아버지의 중매로 남편을 만나게 됐다.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살림살이도 풍족했고, 고등학교까지 졸업 한 남자였다.

 남편의 집과는 다르게 우리집은 잘사는 편도 아니었고, 격차가 너무 나는 집으로 시집가게 되면 구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남편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 얼마나 달아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와 끊임없는 설득으로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남편은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몰래 선물도 사다주기도 했고, 첫째 아들을 낳고 나서 병원에 있는 내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생 많았다”라고 말해줄 때에는 그것보다 벅찬 감동은 없었다. 우리의 신혼집은 남편의 직장으로 인해 서울 청량리에서 시작해 짧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 나이 스물일곱, 우리는 부산 매축지로 오게 됐다.

 없는 살림살이였지만 남편은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고, 둘째 딸아이가 매축지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편은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내게 살아가며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였고, 안식처였다. 그런 남편이 세상에 없다는 상실감에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가 없는 세상에 내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나이 스물아홉

 나는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했다.

 이제 세살이 된 첫째 아이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둘째 아이, 엄마의 손길이 많이 가는 아이들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었다.

 처음엔, 다른 집의 파출부로 나가 일을 했다. 파출부 일은 고된 일이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모든 빨래를 손으로 빨아야 했고, 집주인이 늦게 들어와도 저녁을 차려주고 퇴근을 해야 했기에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집에서 엄마만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것도 오래 하지 못했다. 삶은 너무나 막막했고, 깊은 어 둠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날 살아내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우리 셋 모두 그냥 죽어버리자’라는 결심을 하고 방안에 연탄화로를 들여놓고 자살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연탄가스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희미한 의식 너머로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라는 생각에 엉금엉금 간신히 방안을 기어서 방문을 활짝 열었다. 연기를 보고 놀라 내려온 통장 아주머니께서 깜짝 놀라 올라왔다. 김칫국물 등으로 응급처치를 해 간신히 살아났다.

 통장 아주머니는 방안에 연탄화로가 들어 있는것을 보고 우리가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할 돈도 벌어야 하고 마음도 정리할 겸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갔다. 우리 아이들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을까? 내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려하자 아들은 내 왼쪽 다리를 잡았고, 딸은 오른쪽 다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울먹이시며 친정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네 새끼들을 떼어두고 어디 맘 편하게 다리라도 뻗고 잠이라도 자겠느냐?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시리게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친정에서 돌아온 후, 다시 파출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정말 길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계속 눈에 밟혔다.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우리 세 식구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딸아이가 세살이 될 때까지만 맡겨두려 큰집으로 아이 둘을 데리고 가며 말했다.

 “너희가 열 살만 되면 그때 엄마가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만 참고 엄마 기다리고 있어.” 그러자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아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우리를 안 키우니 정이 없어서 나중에 엄마 소리가 안 나오면 어떡해?” 그 순간 내 가슴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다시 애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되돌아온 적도 있다.

 하루, 이틀 파출부 일은 고된 노동이었다. 거기다 아이들까지 챙기려 하니 더 힘에 부치기도 했다. 파출부 일보다는 다른 일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혼 초창기 남편은 막걸리 제조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보고 배워둔 것이 있어서 집에서 막걸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조해둔 막걸리를 집안의 항아리 몇 개에 만들어 넣어두고 이번엔 막걸리를 사 줄 술집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모든 술집을 돌아다니며 사정을 이야기 하자, 몇몇 가게에서는 막걸리를 사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렇게 조금씩 일이 풀리는 줄 알았지만 허가 없이 집에서 막걸리를 제조해 파는 일은 불법이었다. 그 힘든 순간에도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던 ‘순경’은 곧 단속반이 집안으로 점검하러 갈 예정이니 막걸리 다 부어버리고 항아리는 부숴버리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파출부로 내 인생의 20년을 보냈고, 파출부 일을 그만둔 후에는 수입해온 과자와 케첩 등을 넣은 자루를 들고 나르며 창고 안에 정리하는 일을 했다. (3kg 이 되는 깡통을 몇 개씩 넣으면 20kg이 넘는 쌀가마의 무게보다 무겁다) 그 깡통을 넣은 자루를 짊어지고 나르는 일을 10년 넘게 하고 보니, 세월이 남긴 흔적들은 몸에 전부 새겨진 듯하다. 허리도 통증이 심하고 팔의 뼈 모양도 변해 버렸다.

 내가 고생해온 세월들을 몇 마디의 말로 모두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엄마만 찾으며 울던 불쌍한 내 자식들은어느새 성인이 돼 결혼도 하고 자식들까지 생겼다.

 남편 없이 견디며 보내온 지난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듯 나는 그 손주들을 안아보고는 한다.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나는 살갑지 못한 엄마가 됐던 것은 아닌가 싶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이 유독 매를 들어서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무섭게 엄하게 키웠던 것도 돌아보면 다 눈물이 날 만큼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너희는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녀는 지금 힘든 시대를 살아왔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라진 것이 별반 없었다고 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지만, 실질적으로 요즘의 청춘들이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것들은 많아졌다는 말을 덧붙이며 지금의 ‘청춘’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하는 것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많은 연봉을 받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저 적게 벌더라도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녹록지 않은 형편이더라도 작은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도 오늘에서야 하고 있다.

 나의 삶은 그렇게 흘러왔고 그렇게 변해왔다.

 나의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후회가 되는 것들도 많다. 누군가 쫓아오듯이 왜 그리 나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는지 아쉬움이 많을 때도 있다.

 내 자존심 하나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다.

 하지만 후회만으로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지금의 청춘들이여….

 그대들은 조금 더 여유롭게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시선을 가졌으면 좋겠다.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많은 용돈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식들의 목소리를 한번 더 듣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젊은 청춘들이여! 전화기를 들고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한번 더 드려보도록 하라.

 수화기 너머 떨리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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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 2013-10-25 18:33:24
정말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울컥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