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12 (금)
여행작가 이동근 힐링스토리 - 김남이 할머니
여행작가 이동근 힐링스토리 - 김남이 할머니
  • 이동근
  • 승인 2013.11.24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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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외로움에 그리움 더해 온몸으로 견디며 산 세월 뒤에…
 우리는 너무나 외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가족의 해체, 이웃의 단절, 소통의 장애’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힘든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당신의 인생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타인을 위해 쓰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마치 사치인 듯 말이다.

 당신의 손을 잡아주고,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당신의 얼굴을 만지며, 당신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이 당연하듯, 익숙해져서 당신의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외롭다.

 정말 ‘등이 시리도록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당신의 마음속 온도,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속 온도는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것 만큼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는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오랜 세월 자신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김남이 할머니를 만났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고향을 꺼내며 인생 이야기를 풀었다.

 나는 경남 진주 출생이다.

 내 나이 올해 78살이며, 부모님 슬하에 1남 2녀였지만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배다른 형제가 두 명이 더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엄마가 데리고 갔으나, 곧 아버지는 그곳에 아이들을 놔두면 안될 것 같다며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상 오래 함께 살지는 못하고 본인의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지만, 우리 집의 가정사는 어렸던 내가 이해하기에는 복잡하기만 했다.

 오빠는 마산공고를 졸업했고, 언니도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고 취직을 했지만 오빠와 언니들과는 달리 나는 공부 머리도 없었지만 흥미도 없었다.

 아버지는 나 역시 대학까지는 보내진 못하더라도 공부를 더 시키고 싶어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지난날 그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내 나이가 78살이 되는 동안 부모님과 나의 언니, 오빠들은 지금 이 세상을 모두 떠나 만날 수 있는 곳에 계시지 않다.

 나는 고향집에서 혼기가 찰 무렵 동안 집안 살림을 도우며 살아왔다.

 내 나이 스물넷, 나는 고향에서 서로 애틋하게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는 결혼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 당시는 한쪽 집안이 너무 잘살아도 문제였고, 우리 집안 만큼 못 살아도 문제가 된다고 믿는 시절이었기에,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있던 형부의 중매로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애정이 없는 사람과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니, 남편은 나와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된 남편과 결혼해 청계천에 신혼집을 구했다.

 살면서 부딪히는 것들은 슬기롭게 이겨내면 되는 부분이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후에도 남편의 경제관념은 가정의 위주가 아니었다.

 남편과 살면서 아이를 한 명 낳았지만, 내 아이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뒤의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모든 원망은 남편에게로 쏟아지기도 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이혼을 한뒤, 남편을 피해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도 두려웠기에 다시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가 다시 고향에 닿았을 때는 친정 어머니 세상을 뜨신 이후였고, 집에는 새어머니가 계셨다.

 부산으로 흘러와 갈곳이 없던 나는 언니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본인 시누이가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자동차 타이어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부품 조립하는 일을 이십년 정도 했다.

 부품 모두 일본에서 수입품으로 의존해 제품을 생산하던 시기였기에 부품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싶어, 안전장비 없이 얼굴로 날아오는 잔재들을 모두 맞아가며 일을 할 수 밖엔 없었다. 잔재들에 얼굴을 맞으면 얼굴에 흉터가 남기도 했다. 흡사, 얼굴을 세게 꼬집힌 것 마냥 얼굴은 항상 부어있었다.

 그 일을 20년 정도 하고 나니, 같은 자리에 앉아 손만 쓰는 일이 왠지 지겹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후로, 나는 공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나를 구멍 뚫는 사람을 일컬어 보루방아지매라고 불리었고, 나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나름 인기가 있는 아지매였다.

 잘 알고 지내던 사장님이 가내공업 일을 개업한다며 도와 달라해 그곳에서도 5년 정도 일을 해주기도 했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인데, 외로움은 견딜 수가 없다.

 공장에서 오랜 세월 일을 해오면서 때때로 나를 엄습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공장 사람들과 약주를 마시며 시리도록 외로운 순간들을 이겨내었다.

 너무 외로운 인생이었다.

 술 한잔 마시고 노래도 한가락 하며 흥을 내며 사람들과 섞여 그렇게 웃고 울고 하다보면 그때는 잠시 외로움이 달래지는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나를 위하는 척하며 나를 속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들은 자식들도 있고, 위로 받을 가족들도 있는데 왜 나를 두고 이런 저런사실도 아닌 이야기들을 만드는 것인지 그때는 그들이 솔직히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는 오직 나의 힘으로 내가 벌어서 살아가는 데 저 사람들은 왜 나를 험담하며 밉게 보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외로운 것보다 그 사실이 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부산에서 나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남편은 가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나를 찾았다.

 남편과는 25살에 결혼을 했고,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했다.

 이혼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에도 남편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부산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 남편을 피해서 숨어 다니기도 했다.

 먼저 가버린 내 아들이 살아있다면 지금 세상의 나이로 쉰다섯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일들로 인해 괴롭다.

 매축지는 내가 가진 것이 없어 흘러 들어왔지만, 이곳만큼 아늑한 곳은 없다.

 이 동네에 내가 처음 살 때에는 작은 집에 여러대의 미싱기 등을 두고 공장처럼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한번은 매축지에 비가 많이 내렸다. 지붕에 물이 새서 이불이 다 젖고 불편한 적도 많았다. 매축지 안에서 이사를 여러번 다니기도 했지만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성격 자체가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가게를 가더라도 다른 가게를 가지 않고 한곳만 가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한것 같다.

 내게 여유롭게 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더라도 나는 이대로 매축지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 손에 1억 원짜리 수표가 있다고 해도 나는 내가 떳떳하게 번 천원짜리 지폐가 더 가치 있고 크다’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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