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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院君(대원군)
大院君(대원군)
  • 송종복
  • 승인 2013.12.03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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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대권 마음대로 개입하는 `대원군` 출현 막아야

 조선시대의 `종친등록(宗親謄錄)` `종반항적(宗班行蹟)` `선원계보(璿源系譜)`에 의하면 대원군(大院君)이 4명이나 되는데 세간에서는 흥성대원군(이하응) 1명뿐인 것으로 아는 경향이 많다. 이유는 대권을 행사해 왕권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4명의 대원군을 살펴보면, 1569년 명종이 후사(後嗣) 없어 죽자, 초(?)의 셋째아들 균(鈞)이 즉위했는데, 그가 곧 선조인데,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했다. 1623년 광해군을 폐출(廢黜)하고 선조의 5남인 인빈김씨 소생 능양군 종(倧)을 왕으로 옹립해 인조가 되자, 그의 생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따라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덕완군 승(德完君 昇)이 철종이 됨에 전계군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했다. 또 1863년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의 명에 따라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2남(이명복)이 고종이 되자, 이하응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4명이지만,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명은 그들이 죽은 뒤 추존됐고, 오직 흥선대원군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에 등극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이 섭정(攝政)해,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하며 10년 동안 혁신정책을 폈다. 따라서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권을 잡아, 안동김씨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해 부패관리를 파직시켰다. 서원도 전국의 47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시키고.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간행해 법률제도와 정치기강을 확립했다. 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當百錢)과 원납전(願納錢)을 강제징수 해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됐다. 섭정 10년 만에 명성황후와 고종이 친정하고,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운현궁(雲峴宮:덕수궁)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현 정부는 광복 후 6공화국을 거치고 있다. 그동안 대통령의 권한 뒤에 숨어서 황태자니 상왕이니 하면서 대권을 행사하고 국정을 전횡한 이가 한 두 분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 때는 양자(養子)인 이강석이, 박정희 정부 때는 신복(臣僕)인 김재규가, 전두환과 노무현 정부 때는 형제(兄弟)들이, 노태우 정부 때는 생질(甥姪)이, 김영삼과 김대중 정부 때는 자식(子息)들이, 뒤에서 세칭 `소통령(대원군)`으로 군림했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현 박근혜 정부는 대권을 횡행하는 세칭 `대원군(大院君)`이 다시는 출현하지 못하게 하기 바라며, 아울러 소신껏 민의를 위한 정치가 되기를 간곡(懇曲)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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