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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海鎭(청해진)
淸海鎭(청해진)
  • 송종복
  • 승인 2014.04.17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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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淸:청 - 푸르다, 海:해 - 바다, 鎭:진 -진압하다

 ‘맑고 푸른바다를 진압한다’는 뜻으로 신라하대 이 바다에서 인신매매로, 약탈기지로, 해상사고로, 해상반란으로 문제가 많더니 드디어 ‘청해진 해운’이 문제를 야기 시켰으니 ‘청해진’이 무색하기도 하다.

 청해진의 유사어로 청해진 해운, 장보고 청해진, 청해진 함정, 완도 청해진, 이별의 청해진, 내 고향 청해진 등을 들 수 있다. ‘청해진(淸海鎭)’은 신라 하대 장보고(張保皐)가 지금의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장군 섬에 설치한 해군ㆍ무역 기지로서 828년(흥덕왕 3)에 설치되었다가 851년(문성왕 13)에 철폐한 곳이다. 이곳은 당시 신라와 당나라 및 일본을 잇는 삼국의 해상교통요지이며, 삼면의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의 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이 청해진 해운소속의 ‘세월호’가 침몰해 290여 명이 사망ㆍ실종했으니 옛 ‘청해진’의 위풍이 아쉽기만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당보역간(唐寶歷間)>에 의하면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로 삼으니, 42대 흥덕왕이 장보고를 청해진대사로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진’에서 약탈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46대 문성왕 8년에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자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13년에 파진(罷鎭)시켰다.

 장보고는 20대에 당(唐)나라 군대에 투신해 공을 쌓아, 무령군 소장까지 진급하고는 조국에 돌아와서는 완도근해에 청해진을 베풀고 주변의 일본과 중국을 총괄하는 해상왕(海上王)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조정에서는 그 부하들이 또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완도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그 후 851년에는 이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전라도 북쪽 벽골군(현, 김제군)으로 옮겨 살도록 명령하였다. 그때부터 5백 년이 흐르는 동안 완도[청해진]은 폐허가 되었다. 다시 완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부터인데, 지금은 교역과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옛 청해진의 후광으로 일익월장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곳곳에 옛 건물들을 복원해 놓아 ‘청해진’과 ‘장보고’에 대한 향수가 깃들고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청해진’은 인신매매로, 무역기지로, 해상교통요지로, 해상의 반란으로 문제가 많더니 드디어 근 300여 명의 고교생이 희생된 곳도 바로 ‘청해진’ 명의인 해운사이다. 당시에는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아시아 해상교통권을 장악한 뒤 국제무역을 활발히 벌였다. 그런데 최근 바다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한국ㆍ일본ㆍ중국 간의 분쟁을 척결하고, 또한 ‘청해진의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장보고(張保皐)의 재출현이 나타나기를 차제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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