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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하동 정서리~노량마을
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하동 정서리~노량마을
  • 김루어
  • 승인 2014.05.01 21:2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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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종군행로 흔적에 밴 역사 무게가…
▲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하동읍성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
노량해전 등 대승 대가로 공의 생명요구는 선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천명인가

 녹색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색이다. 산 제 본래 색이 그렇고 바다 제 본래 색이 그렇다. 들 제 본래 색이 그렇고 강 제 본래 색이 그렇다. 산과 바다, 들과 강은 봄과 여름이 제철이다, 제 본래 색인 녹색으로 한껏 빛나기 때문이다. 이런 산과 바다, 강과 들을 갖춘 땅 가운데 하나가 하동이다. 하동에는 이런 자연조건 이외에도 사람을 끄는 신화와 전설과 문화와 역사가 있어 전부터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특집기사에 필진으로 참가하면서 그 오래된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나는 이번 하동기행은 역사를 따라가기로 했다. 출발지는 악양면 정서리. 정서리는 금석병용기 시대 이래로 마을이 형성되어 삼한시대에는 변진 12국 가운데 하나인 낙노국(樂奴國)의 발상지가 된 유서(遺緖) 깊은 지역이다. 나는 그 유서 가운데 조선시대 실마리[緖]하나를 잡았다, 바로 1597년 7월 10일¹에 충무공 이순신이 하동경내에 들어온.

 그런데, 이순신! 하면 한국인에게는 어찌 보면 일종의 클리셰(cliché)한 이름이 되어 버린 느낌이 있다. 한국인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관성적으로 들어온 이름이어서인지 모르겠다, 특히 나처럼 내륙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서ㆍ남해안 지역을 한 번이라도 여행한 이들에게는 결코 공(公)의 이름은 클리셰한 이름이 될 수가 없다. 4세기 이상 지났지만, 곳곳에 공의 행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동은 공의 행적가운데서도, 임진란 7년 중 가장 불운한 시기와 순국시기와 연을 맺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하동에 왔을 때 공은 백의종군²신분이었다, 왜로(倭虜)의 세작에 조응한 진영의 음해로 한성 금부에 투옥되었다 목숨만 건져 초계에 있던 종군지인 원수부(元首府)로 가는. 공이 간 종군로 가운데 하동구간은 74km이고 첫 도착지는 악양면 정서리다.

 나는 북서쪽에 우뚝 솟은 지리산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 키고 차를 출발시켰다. 날씨는 더 없이 좋았다. 산과 들이 한껏 제 본래 색으로 빛나는 사월 하순의 한낮. 하지만 공이 왔을 때는 퍼붓듯 비가 솟아지는 날씨였다. 심리상태마저 최악이었다. 종군행로 중 아산에서 노모가 공을 만나러 오다 타계하였지만, 길을 재촉 받아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것. 차창 밖으로 녹색으로 빛나는 들과 산의 풍광들이 흘러간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 그때 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슬픔과 분노를 삭이는 행로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삭이는, 음해로 죄 없이 죄를 입은 분노를 삭이는. 차는 그새 악양 들을 지나고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전쟁 중 공을 음해하거나 거기에 편승한 자들이다. 원균이나, 윤두수 형제, 그리고 당시 임금인 선조. 특히, 전쟁 중 유일하게 연전연승하는 장수를 무고하게 죽이려고까지 한, 선조의 악의는 상식선에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눈앞이 시원해졌다, 저만큼 섬진강이 보인다. 차가 좌회전하여 강변대로에 올랐다. 강변고수부지는 잘 재단되어 공원과 운동장과 캠핑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이 왔을 때는 장마철이어서 치수되지 않은 강이 범람하여 아마도 길이 질퍽였을 것이다. 공은 정서리에서 하루 묵고 길을 떠나, 지금은 섬진교가 놓인 광평리에 있는 나루인 두치진 어름에서 다시 밤을 묵은 다음 읍성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차는 평일이어서 마음껏 달린다. 나는 선조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물을 쓰기위해 선조실록을 꼼꼼히 읽은 적이 있다. 그 시대는 조선조를 통하여, 세종시대와 더불어 인재가 가장 많이 난 시대로 평가된다, 목릉성세로 불릴 정도로. 하지만 그는 세종처럼 인재들을 선용하기는커녕 그들을 분열시키고 그에 편승하는 것을 권력유지의 방도로 일관했고, 이 행태는 자신의 판단미스로 대비 없이 전쟁을 맞아 나라가 누란지위에 처한 상황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문득 강풍경이 사라져 차창 밖을 살피니 차는 어느새 강변대로를 벗어나 고전면으로 가고 있다. 그 유명하다는 하동송림과 하동포구길 팔 십리를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에 뒤를 돌아 보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은 군청이 하동읍에 있지만 임진란 시에는 군청에 해당하는 하동현청이 고전면에 있는 하동읍성에 있었다. 우체국을 지나자 곧 읍성을 알리는 표지석이 선 마을이 나타났다. 기록에 따르면 하동읍성은 야트막한 양경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 돌을 쌓아 1417년에 만든 둘레 1천400m, 폭 4.5m, 최고높이는 5.2m 정도의 작은 성이다. 공은 7월 12일 저녁, 읍성에 도착했다. 하동현감 신진(申?)이 공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별채에 묵게 했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공이 종군로로 거쳐 간 각지방의 수령들이 신진처럼 공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말은 뒤 짚으면 그들 모두가 공의 억울함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되리라.

▲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로 따라 발걸음을 떼면 공(公)의 순수한 나라사랑이 가슴에 그려진다. 하지만 당시 꼬이고 꼬인 정치상황을 떠올리면 마음 한 켠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차에서 내렸다. 마을회관을 지나 산 쪽으로 얼마 오르지 않아 읍성 남문 터가 나타났다, 본성과 옹성돌무더기로 엉킨. 남문 터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경사가 높아지고 작은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대나무 숲 사이로 나 있다. 이어진 나무계단을 따라 왼쪽으로 오르니 그 끝은 성 북쪽에 해당하는 양경산 정상(146m)이다. 정상에서 남쪽을 보았다. 조망이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 높고 푸른 금오산(849m)이 우뚝 버티고 있고, 그 너머는 남해바다이리라. 이틀 동안 하동읍성에 머물며 공은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머무는 동안 공은 아마 양경산 정상에 올라 나처럼 금오산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당연히 그 너머 있는 바다를 떠올렸을 것이다. 공이 원하지 않았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바다를.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성안을 둘러보았다. 하동군청은 2015년까진 읍성을 복원한다고 했는데, 복원은커녕 방치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읍성지는 엉망이었다. 민간주택은 그대로 있고, 농경지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가축분비물마저 낭자하여 사적지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동군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니, 계획대로 복원을 하기는 한다고 한다.

 공은 7월 14일 읍성을 떠나 초계로 가 권율막하에서 종군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공의 종군로를 뒤따르지 못한다, 하동에서 허여된 일정 때문에. 대신 나는 읍성에서 내려와 차로 금남면 노량마을로 갔다, 하동에서 아니 하동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공의 마지막 인연지가 된. 그 과정은 이렇다. 공이 권율막하에서 종군하던 8월 28일 공을 음해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 수군에게 전선과 수군을 전부 잃다시피 하는 대참패를 당하자 당황한 선조는 공을 다시 통제사로 삼는다. 하지만 흔연할 수만 없는 상황이었다. 장졸들과 전선이 남아 있지 않은 허울뿐인 통제사… 게다가, 품계는 두 계단 강등된 정삼품! 이는 넘쳐나는 정삼품인 수사들로 공을 견제하겠다는 선조의 암계일 터. 하지만 공은 묵묵히 전선과 장졸들과 군량미를 모은다. 모은 전선은 모두 13척. 이 전선으로 공은 수륙병진을 기도하던 왜전선 133척을 10월 25일 명량해협으로 유인 대파한다. 이 해전은 불가능을 현실로 만든 신화다. 왜로의 재침에 다시 피난을 준비하던 선조는 전승보고를 받자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이어서 ‘가자(加資)하는 것은 좀 지나친 듯하다’고 말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그러면, 공은 이런 선조의 적의를 몰랐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어리석다. 이겨놓고 싸운다는 평을 받는 공을 모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공은 선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침을 맞자 국민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황음이 원인이 되어 명나라로부터는 양위를 강요받았고, 민생은 팽개치고 잘못은 모두 신하에게 돌릴 만큼 비열하고, 유능한 신하는 눈엣가시로 여길 정도로 협량하여 민심이 이미 떠난 군주임을! 역사는 이런 유형의 군주에 대처하는 정형을 보여준다. 쿠데타. 시이저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다. 현대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다. 공이 살던 조선조를 연 이성계가 그랬기에. 그러나 공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차가 왼쪽으로 꺾자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한참을 달리자 저만큼 남해대교가 보이고 나는 한 작은 어촌 마을입구에서 내렸다. 노량마을. 나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다. 바다는 좁다, 건너편 해안이 보일만큼. 바로 노량해협!

 나는 해변을 따라 걸었다. 명량에서 승리한 공은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음 해 가을 풍신수길이 급사하자 왜로는 철수를 서두르고 조정과 명군은 철수로 보장을 두고 논란을 벌인다. 하지만, 공은 이를 극력반대 명 수군총병 진린을 설득, 조명연합전선을 출동, 왜 전선 500여 척을 12월 15일 밤 노량해협으로 유인 관음포로 몰아넣어 대파하지만 전투가 끝나가던 다음 날 새벽 적 유탄에 순국한다. 현대의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민심을 얻고 군권을 잡고 있던 공이, 이미 존재이유를 상실한 조선조를 무너뜨리지 않은 것을 미스터리로 본다.

 나는 마을로 들어섰다. 특이하게, 집집마다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공의 일생을 그린. 벽화를 따라가다 나는 마지막 벽화 앞에 섰다, 적에게³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고 말하며 순국하는. 공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공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나는 공의 종군행로를 생각했다. 투옥되었을 때 공은 선조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성서 하삼도까지 넉 달 동안 종군하면서 공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민생의 참상을 보았을 것이고, 이는 공의 마음을 분노는 비우고 애국과 애민은 채우는 쪽으로 몰았을 것이다. 즉, 왕조를 끝내는 것보다 전쟁을 끝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터.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로 공은 불가능해 보이는 명량해전,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지만 하늘은 그 대가로 공의 생명을 요구했다. 어쩌면, 하늘은 선조의 마수로부터 공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리 데려 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위로해 보아도 공의 일생을 새기다보면 고비 고비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의 일생을 그린 마지막 벽화 앞에 설 때처럼.

 註) ¹ 날짜는 본고에서는 전부 양력으로 환산했다. 난중일기에는 음력 5월 26일로 되어 있다.
 ²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직책만 정지될 뿐 신분은 유지한 채 군에 복무하며 공을 세울 기회를 갖게 하는 처분이라는 게 정설이다.
 ³ 출전은 징비록. 적에게, 라는 표현은 원문에 없다. 원문은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투 중 대장 전사를 적에게 알리는 바보는 없다. 이 유언은 공이 자신의 전사가 아군 사기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하여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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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관 2014-05-07 21:56:20
이순신 장군의 죽음의 진실은 역사 책에 나온 대로 믿기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할 뿐....
어차피 선조에 의해 버려짐을 예상해서 임무를 마치고 스스로 적의 총탄에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선조나 정적들에 의한 암살이였을 수 도 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역사책의 기록이 항상 진실이 아닐 것이란 생각도 하면서....

김민학 2014-05-06 17:52:29
글을 읽고 있노라니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그의 한숨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지도자인 그 분 앞에 세월호 침몰 참사로 국가적 리더쉽이 붕괴한 이 나라의 현실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넓은 바다에서 수 많은 물 비늘을 바라보며 고독한 싸움을 했을 그 분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봅니다.

김무열 2014-05-05 19:24:57
마음과 달리 여건이 허용치 않아 자주 찾아 올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좋은 글을 접하게 될 때의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목마른 갈증을 해결한다고나 할까요?

오래도록 글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함을 전하며.

강대선 2014-05-03 16:26:46
충무공의 마음은 지금에 돌이켜보아도 마음이 먹먹합니다 칼의 노래를 읽다가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는데 정치의 비정함과 서글픔을 느껴서였을까요
한 인간으로서의 아픔과 용기와 죽음에 숙연해지는 날입니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은 이들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충무공께서 쓰러지신 바다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을 느끼는
무슨 이유인지...
시인님의 아릿한 마음인지 바람이 가지를 흔듭니다

효원 2014-05-02 23:37:41
선생님께서 쓰신 장군 이순신의 길을 따라 저도 걷다보니
벽화앞에서 멈추게 되고 남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고금의 현실이 겹쳐지며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고통을 약간이라도 공감합니다

바다는
전쟁으로 참혹한 상황도 다음날이 되면 다 수장시키며
아침노을을 비추며 평화로움을 보여줍니다
바다의 포용이라해야 할지 어떨지

그때의 실록도 어지럽지만 지금의 현실도 어지러운,

바다가 참 시린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