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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百錢(당백전)
當百錢(당백전)
  • 송종복
  • 승인 2014.11.13 0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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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송종복
 우리가 흔히 ‘땡전 한 푼도 없다’는 말의 ‘땡전’은 바로 당백전(當百錢)인데 ‘당백전’ 가치가 갑자기 떨어지자 ‘땡전’이라 불렀다. 당시 일부 상인들은 고액화폐인 당백전으로 바꿨다가 통용이 금지된 후 헐값환수로 큰 손실을 입었다. 이 시기 흥선대원군(이하응)은 자신의 아들(이명복)을 고종으로 앉히고 섭정했다. 그 중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마련키 위해 발행한 것이 당백전이다.

 이 당백전은 1866년 11월 6일에 주조해 5개월만인 1867년 4월에 중단됐다. 중단 이유는 당시의 유통화폐가 1만 냥인데, 또 1만 6천냥을 남발했기 때문에 통용한지 2년 만에 사ㆍ농ㆍ공ㆍ상이 모두 병들어 인플레이션(inflation)이 일어났다. 당시 상평통보는 당일전(當一錢), 당이전(當二錢), 당오전(當五錢), 당백전(當百錢)의 4가지가 있었다. 당백전의 원어는 호대당백(戶大當百)인데, 이를 당백(當百)ㆍ당전(當錢)ㆍ땅전ㆍ땡전이라 불렸다.

 이 당백전의 재료인 구리[銅]가 부족하자 법주사 입구에 있는 청동미륵불상을 깨어 당백전으로 녹여버렸다. 이 대불상은 높이 33m의 동양최대의 미륵불이며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세운 것이다. 이후 1939년 서양조각가 김복진이 시멘트로 만들다가 경비부족으로 중단된 것을 1963년에 박정희 대통령과 이방자(순종의 비) 여사의 시주로 착공해 1968년에 완공했다. 그러나 시멘트불상에서 녹물이 흘러나오자, 1987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 청동 116t을 들여 대불을 조성했다. 그 후 2000년에 순금 80㎏의 금박을 입혀 17개월 만에 미륵금동대불을 완성한 것이다.

 이런 아픔을 갖고 있는 ‘당백전’은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2009년에 5만 원권의 고액을 발행했다. 현재 통용화폐량 중에 2/3가 5만 원권인데 유통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즉 은행에서 출금된 후 회수는 50%밖에 되지 않고 있으니, 은행에 5만 원권을 요구하면 극히 제한적으로 주고 있다.

 즉, 돈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이 5만 원권이 안 돌고 있으니, 은행이 돌아 버린 셈이다. 이것이 문제다. 어떤 때는 마늘밭에서, 도피 중인 유병언의 가방에서, 모 국회의원의 아들 사금고에서 5만 원권의 뭉치 돈이 쏟아져 나왔다. 이같이 고액권이 제2의 당백전 현상이 오지는 않을까 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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