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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髮所(이발소)
理髮所(이발소)
  • 송종복
  • 승인 2015.02.11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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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理:이 - 다스리다 髮:발 - 터럭 所:소 - 자리

 이발소는 머리카락 깎는 곳인데, 그곳에 가면 동네 소문을 다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요즘은 상호 얼굴도 못 보게 아방궁같이 칸막이를 하니 옛날같이 동네 소문 듣기가 그립기만 하다.

 일명 이발소(理髮所)ㆍ이용실(理容室)ㆍ이발관(理髮館)ㆍ이용원(理容院)이라고도 부른다. 이같이 명칭에 혼란이 오니 통일된 이름이 아쉽다. 그런데 건물의 명칭을 보면 그 건물의 대소여하에 따라 붙이는 것이 통예이다. 숙박업소를 봐도 여인숙 < 여관 < 모텔 < 호텔로 부르고, 공공건물을 봐도 정(亭) < 루(樓) < 헌(軒) < 재(齋) < 각(閣) < 합(閤) < 당(堂) < 전(殿)이라 부른다. 따라서 조선 시대 임금을 부를 때 최고의 큰 건물을 전(殿)이라 하여 전하(殿下)라고 불렸다. 광복 후 이승만 정권 때는 내각을 지휘한다 해 각하(閣下)라고 한 적도 있다.

 이발소의 표지판은 적색ㆍ청색ㆍ백색으로 된 회전간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간판의 시초는 1540년 파리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이유는 한때 이발사가 전쟁터에 나가서 의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 징표로서 적색은 동맥피ㆍ청색은 정맥피ㆍ흰색은 붕대를 말함이니 원래 외과 의사를 겸했다는 것이다.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내리자 머리를 깎게 됐다. 이날 고종황제가 제일 먼저 자신의 머리를 깎은 단발 1호이다. 이어 각 대신들도 단발케 하니 공조판서를 지낸 최익현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못 자른다(두가단(頭可斷) 발부단(髮不斷))’고 완강히 버텼으나 결국은 수감돼 상투가 잘렸다. 여성 머리는 1920년 오엽주(吳葉舟)가 화신백화점에 최초로 미장원을 개업해 ‘댕기 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를 했다. 1930년대에는 ‘칠흑 같이 검고 삼단 같은 머리채’는 어느덧 사라지고 ‘새 둥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듯한 짧은 파마머리가 유행했다. 남성들은 ‘하이칼라 머리에 망토를 입고 귀국한 멋쟁이 유학생’으로 둔갑했다. 광복부터 1960년 초까지는 ‘가르마’를 타는 것과, 뒤로 넘기는 ‘올빽’형이 유행했다.

 필자가 지난 80년대 초 대만(당시는 중국이라 호칭했고, 현재의 중국은 중공이라 불렸다.) 정치대학학술회 참석 중 거리에 이발소ㆍ이발관ㆍ이발원이란 명칭을 봤다. 위치는 번화가의 몫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행인에게 호객까지 하는 것을 봤다. 이 문화가 유입돼 우리도 내부에 칸막이를 하고 밀실에서 영업하는 이발소가 등장해 미풍양속을 해치는 퇴폐업소로 규정돼 단속 대상이 됐다. 최근에는 ‘휴게소’라 하며 남성이용사는 아예 없는 실정이다. 옛날 마을의 소문을 알려거든 이발관에, 여자는 빨래터에 가면 다 알 수 있다는데 그런 시대가 그리우며 그 흐뭇한 인생살이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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