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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암 중창(重創)’ 기도 도량 영험 잇는다
‘미타암 중창(重創)’ 기도 도량 영험 잇는다
  • 임채용 기자
  • 승인 2015.03.23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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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 천성산 700m 위치 자연석 바위 앞 절 우뚝 자연 석굴 속 보물 간직
▲ 양산시 웅상읍 천성산에 자리잡은 미타암.
 양산시 웅상읍 천성산 미타암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면서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명맥을 더 깊게 이어가고 있다. 천성산은 명산 중의 명산으로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천명의 승려를 화음경으로 교화해 모두 성인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양산에 영축산 통도사가 있다면 웅상에는 천성산 미타암의 불교 성지가 있다.

 주지 산옹 큰스님은 “미타암은 불교 성지로서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찾고 싶어하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가 담긴 전통 사찰이다”고 소개했다.

 미타암은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 바위가 사찰 뒤를 휘감고 있다. 또한 웅상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다. 자연 석굴 속에는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보물 제998호로 지정돼 있다.

 산옹 주지는 “지금까지 미타암은 예산과 모든 여건 등 부족으로 중창(重創, 건물을 헐거나 고쳐 지음)을 못해 어려움을 겪어 왔고 신도들 불편이 이만저만한 것을 아니었다”고 말했다.

 미타암은 중창 불사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산옹 주지는 “항상 신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숙제를 안고 있었지만 이제 신도들이 어디서나 안전하게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다”고 했다.

 산옹 주지는 “국비 7억 원과 자비 7억 원을 들여 중창 불사를 하면서 들어가는 돈 걱정보다 안전이 제일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해발 700m에 있는 미타암을 가려면 걸어 오르내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사찰 내에 철 난간이 쳐져 신도들의 좁은 공간에서 안전에 유의해야만 했다. 석축공사가 끝나 안전문제가 해결되고 넓은 기도처가 마련돼 명실공히 기도의 도량이 갖춰졌다.

 미타암 석축공사를 하려고 석공들이 각지에서 왔지만 공사 현장이 위험하고 돌무게 250㎏짜리 돌을 다루는 게 만만치 않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공사가 아니기 때문에 석공을 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산옹 주지는 공사 과정에서 염두에 둔 것은 한 건의 안전사고가 나지 않는데 있었다. “만약 안전사고 등이 발생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주지와 사찰에 큰 어려움이 닥치기 때문에 스님을 중심으로 모든 신도가 일심 단결해 불철주야 안전에 긴장을 놓지 않았다”는 산옹 주지는 “이제 공사 마무리 단계에 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와 신도들의 노력과 협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옹 주지는 여전히 마음에 걱정이 남아 있다. “이번 중창 불사로 새 단장을 했지만 고정신도 8천여 명과 유동신도 1만 6천여 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재래식이라 불편이 크다”면서 “하루빨리 현대식으로 보수해 신도들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주지의 소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산옹 주지는 “양산시가 적극 협조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 천연동굴에 인공을 가해 만든 석굴사원인 미타암에서 불자가 불공을 드리고 있다.
천연동굴 석굴 사원

 원효대사가 646년(선덕여왕 15년)에 창건한 89암자 중 하나로 본다.

 920년(경명왕 4년) 지공대사가 중창한 후, 1376년(우왕 2년) 중창, 1888년(조선 고종 2년)에 다시 중진이 중창해 구한말에 우리나라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의 제자 혜명이 주식했으며 그의 비석이 남아있다.

 미타암은 천연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석굴사원이다.

 삼국유사 포천산 오비구조에는 다섯 비구가 포천산 석굴에서 아미타불을 염해 수행하면서 득도해 극락으로 갔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이 포천사의 석굴이 지금의 미타굴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석굴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불은 신라 문성왕후가 병을 앓자 석굴에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을 드려 병을 고칠 수 있다 해 봉안하게 됐다는 일화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719년에 조성된 국보 제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여러모로 닮아 주목되며 남북국시대(통일 신라시대)의 뛰어난 석조예술로 보물 제998로 지정돼 있다.

 또한 미타 설굴은 신라의 불살을 봉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석굴암의 성립 시기와 경덕여왕의 재임 시기가 겹쳐 양산의 석굴암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미타암은 미타굴의 중심으로 이뤄진 아미타 도량으로 후세에 법당과 여러 당우를 지어 현해 모습을 갖게 됐다

 근래에는 고승들이 수도 정진하기 위해 이곳을 거쳐 갔고 오늘날에는 간음기도 도량으로써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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