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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兵館(세병관)
洗兵館(세병관)
  • 송종복
  • 승인 2015.04.22 2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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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洗:세 - 씻다 兵:병 - 무기 館:관 - 관청

 세병관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피 묻은 병기를 닦아낸다’ 는 뜻이다. ‘兵’은 군사가 아닌 병기로 보아, 더 이상 전쟁은 말고 평화를 누리자는 것이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의 명칭은 중국 唐의 두보 詩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와 피 묻은 병기를 닦아낸다’는 뜻이다. 혹자는 ‘세병관(洗兵館)’의 ‘兵’을 ‘군사’로 보아 군인을 뜻하는 것은 잘 못 해석이며, 이때 ‘兵’은 군사가 아닌 무기로 봐야 할 것이다. 세병관은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릉포(한산도)에 있는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ㆍ전라ㆍ충청) 수군을 총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로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4년 대외 방어세력을 일원화하기 위해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를 합해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이 건물은 본래 1603년(선조 36)에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후일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됐다.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 제독이다. 지금의 통영이란 유래는 이 ‘통제사영(統制使營)’을 줄여 ‘통영’이라고 했다. 이 ‘세병관’은 1646년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규모를 크게 중건했고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 서유대가 쓴 글씨이며 현존하는 세병관은 1872년 제193대 통제사 채동건이 중수한 것이다.

 이 세병관은 단순한 관아보다는 백성들의 염원을 기원하는 건물이다. 두보의 詩 ‘세병마(洗兵馬)’란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라는 내용이다. 이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풀이되는데 이로 보아 큰 전란을 이겨낸 군인들은 병기가 필요 없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은 17세기 초 경복궁의 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의 진남관(국보 제304호), 통영의 세병관(국보 제305호) 등이다. 그 중 세병관 곁에는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지과문(止戈門)과 왜장의 항복문서를 받는 곳인 수항루(受降樓)가 있다. 이 세병관은 사적기념으로 보기보다는 민족의 울분과 원한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를 봄으로써 우리의 조상들이 왜인(일본)에게 얼마나 많은 침입과 약탈에 시달렸는가를 재삼 치를 떠는 형국으로, 또한 요즘 아베의 망언과 별차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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