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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준 가훈
나를 지켜준 가훈
  • 박세경
  • 승인 2015.05.26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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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경 수필가
생활에 깃들인 집안 가훈 정신
물 스미듯 후대로 이어지길

 10여 년 전, 아들네가 좀 큰 아파트를 장만해 살림을 났을 때다. 우리 집에서는 손녀 자매가 한방에 2층으로 놓고 쓰던 침대가 오랜만에 분리돼 각각 제방을 찾아갔다. 어리지만 제 취향대로 방을 꾸미고 정돈하며 들뜬 손녀 자매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지없이 흐뭇했다.

 이사를 했어도 녀석들은 같이 살던 정 때문인지 토요일이면 가끔 우리 집에 와 자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서 뒹굴던 작은놈이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서는 혼자 있으면 무서운데 할머니 집에 오면 왜 안 무섭지? 참 이상하단 말이야.”

 아들네와 우리 집은 크기가 같았지만 4대가 함께 살던 우리 집과는 달리 저희 네 식구만 사니 고적했나 보다.

 그래서 어떤 집에 살 때가 제일 좋았나를 물었다. 녀석들은 새로 이사한 큰 집도, 할머니 집도 아닌 오피스텔이라고 했다. 뜻밖이다. 오피스텔은 시모님 병환이 위중하셔서 잠시 아들네가 나가 살았던 곳이다.

 무에 그리 좋더냐는 물음에 큰손녀는 “우리 네 식구가 오글오글 살았잖아요. 거기는 침대도 없이 매트 두 개 붙여놓고 같이 뒹굴고, 간지럼 태우고 아빠 등에 말 타고, TV도 똑같은 것 보고, 그런 게 모두 참 재미있었어요”했고, 작은 손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다가 일어나도 식구가 다 보이는 게 좋고요, 라면 끓여 냄비 채 둘러앉아 먹는 것도 좋았어요.”

 어린 시절, 나도 그렇게 살았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 짓게 했다. 6ㆍ25때 피난 가서 아래 윗방에 어머니와 우리 8남매가 그야말로 오글오글 모여 살 때였다. 부엌세간은 냄비 두어 개에 양재기 여남은 개, 누가 오면 그릇은 물론 수저도 모자랐다. 끼니는 거르지 않았지만 음식은 거칠고 양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불평은 없었고 서로서로 눈치껏 아쉬운 수저를 내려놓아 행동이 느린 아우나 형, 때로는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시는 어머니를 챙겼다.

 밤이 돼 한 이불에 몇 명씩 발만 넣고 자려면 늘 추워 몸을 웅크리곤 했다. 그래서 자리다툼에 이어 이불을 끌어당기고 미는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그 속에서 웃고 울기도 했지만 얼마나 애틋하고 정겨웠든가?

 요즘처럼 자식 하나만 낳아 떠받들고 사는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우애와 배려가 넘쳐났다. 그런데 불편한 오피스텔에서 손녀 자매가 그런 체험을 했다니 얼마나 다행이던지.

 금년에 큰 손녀가 대학생이 됐다. 나는 진즉부터 졸업선물로 책가방과 지갑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백화점에서 만나, 수험생들에게만 특별 할인이 된다는 명품지갑 하나를 사주었다. 내친 김에 책가방도 사주겠다는 할미에게 손녀는 예상보다 비싸다면서 더 생각해보고 사겠단다. 그래서 개학 무렵 채근을 했더니 “할머니, 저 가방은 개학하고 선배들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살래요”한다. 그러면 돈을 주겠다니까 “선물은 지갑만으로도 충분해요”하고는 덧붙여 말했다.

 “할머니, 옷이나 가방 같은 걸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 보다 나를 명품으로 가꾸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녀석이 대견한지 곁에서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우리가 처음으로 어렵게 작은 집을 사 이사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시백부께서 붓글씨로 써 액자에 넣어주신 집들이 선물인 가훈은 신의성실(信義誠實) 근검절약(勤儉節約) 묵인자숙이다. 결혼한 후 3년, 유난히 자신에게 인색해 내게 왕구두쇠라 불렸던 남편. 그에게는 처자식 외에도 보살펴야 할 부모와 형제가 일곱이었다.

 그동안 떨어진 양말 꿰매 달래 신는 남편과 찢어진 신문쪼가리 모았다가 종이 그릇 만들어 아이들에게 튀밥 담아 내미시는 시할머니를 궁상이라 여겼던 나는 형편없는 철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부터 나도 쓸 만한 것이면 봉투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손자 손녀들에게는 제 어미아비 외에도 든든한 후원자 할아버지가 있는데도 녀석들의 근검절약이 우리 부부를 닮아간다. 그 옛날 나를 철들게 했던 가훈은 이제 물이 스미듯 후대로 이어지는가 싶어 흐뭇하다.

 가훈은 내게 시댁과 남편에 대한 불평불만을 잠재우고 순종과 인내를 선물했다. 덤으로는 가정의 평화까지 얹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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