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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石墓(지석묘)
支石墓(지석묘)
  • 송종복
  • 승인 2015.11.11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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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支:지 - 받치다 石:석 - 돌 墓:묘 - 무덤

 고임돌(支石墓)을 일본은 지석묘, 중국은 석붕(石棚), 유럽은 Dolmen(거석기념물), 우리는 고인돌 또는 지역경계표라 한다. 너무 흔해 보존 가치는 ‘별로다’라고 본다.

 고인돌을 무덤으로 보는 학자도 많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종족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 혹은 기념물로 보는 이도 있다. 따라서 무덤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역사시대의 유물은 기록이 있지만 선사시대의 유물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고인돌에는 문자의 기록이 없다. 유럽은 무덤이 아닌 거석기념물로 취급한다. 우리는 유독 무덤으로만 알고 이를 관리하기를 자기 조상보다도 더 신경 쓰고 있다. 좋은 현상이고 참 고마운 일이다.

 한국의 고인돌은 남방식과 북방식이 있다. 한강을 기준으로 해 남쪽은 바둑판같이 낮게 구성돼 바둑식 고인돌이라 한다. 북방은 식탁같이 높이 구성돼 있어 탁자식 고인돌이라 한다. 그런데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은 학자들 간에 일치되지 않고 있어 이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해 주로 신석기시대에 사용됐다고 한다. 남방식 고인돌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많이 보이고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북에 주로 분포돼 있는데 유독 이례적으로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이 고인돌은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주도에는 100여 기가 있는가 하면 전남지방에서 무려 2만여 기나 분포돼 있다. 전국적으로 약 3~4만여 기로서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문화재의 보존은 후대에 조상의 문화를 전승하는데 있다. 고인돌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연구가 없었다. 조선후대 김정희(1786-1856)의 <금석과안록> 이후부터다. 이를 학문으로 정착된 것도 일제가 조선고적을 조사한 것을 본 우리는 최근에 고고학과를 설치함으로 귀중하게 다룬다.

 역대로 우리나라가 통째로 먹힌 적은 임진왜란뿐이었다. 부산에서 파죽지세로 전국을 18일 만에 삼킨 것은 미증유의 사건이다. 이때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막지 못했다면 전주사고가 소실됐을 것이요, 이 사고(史庫)가 없었다면 우리의 조상은 영락없이 지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이때 김해에서 송빈 의병장이 3~4일간 죽음으로 왜적을 막아 ‘딜레이’ 시키지 못했더라면 의령의 곽재우도 없었을 것이다. 송빈 의병장의 혼백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섰던 큰 돌을 후세에 고인돌이라 하며 안내판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고인돌이 이렇게 가치 있는 줄이야 미처 몰랐으니 말이다. 이 바위의 가치를 선사시대에 둘 것이냐, 역사시대에 둘 것이냐에 대해 다시 안내판을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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