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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情歌(다정가)
多情歌(다정가)
  • 송종복
  • 승인 2016.01.13 2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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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多:다 - 많다 情:정 - 정 歌:가 - 노래

 의좋은 형제는 금덩이를 주우면 강물에 던져 버린다. 반을 나누지만 형이 없었다면 독차지할 수 있다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버림으로써 서로 원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아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는 ‘다정가(多情歌)’인데 고교 국어책에 실려 있다. 이를 지은 이조년(1269~1343)은 경북 성주 사람으로 강직한 성품 때문에 많은 이에게 미움과 배척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려 말 충렬ㆍ충선ㆍ충숙ㆍ충혜왕 4대에 걸쳐 보필한 문신이다. 그는 공민왕의 권신 이인임의 조부이며 그의 영정은 현재 경상대학교에 보관돼 있다.

 필자가 몇 년 전 합천군사(陜川郡史)를 편찬하던 중 군수 명단에 이조년을 발견하고는 긴가민가 하다가 ‘다정가’를 지은 이조년임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에게는 5형제가 있었는데 ①백년(百年), ②천년(千年), ③만년(萬年), ④억년(億年)이다. 따라서 자기는 ⑤조년(兆年)이 된 것이다. 보통 형제들은 일동, 이동, 삼동 또는 일수, 이수, 삼수 등인데 조년의 부모는 ‘숫자순서’가 아닌 ‘숫자단위’로 지은 것이 특이하다. 아마 자식들이 모두 입신양명해 가문의 영광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의좋은 형제이다. 억년(億年)과 조년(兆年)이 서울근교로 가다가 금덩이를 주워서 나눠 가졌다. 그들은 기쁨으로 길을 재촉해 양천나루를 건너다가 억년(億年)은 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깜짝 놀란 형이 이유를 물으니, 만약 형이 없었다면 두 개 몽땅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면 원수가 될까 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형도 역시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 여울을 금덩이 던진 곳이라 하여 지금도 금천교라 부른다.

 이조년은 충렬왕(1306년)을 따라 元나라에 들어갔다. 왕의 부자간 다툼에 연루돼 유배를 당했다. 유배 후 13년간 고향 성주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등극하자 그를 성산군(星山君)에 봉했다. 이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고향을 빛냈다. 후에 성주는 현(縣)에서 군(郡)으로 또 도호부로 승격하더니, 조선 선조 때는 경상도감영(현:도청)까지 설치된 적도 있다.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 시조로 지었다. 자신은 ‘이화’에, 간신들과 궁궐은 ‘삼경’에, 충성심은 ‘일지춘심’에, 왕은 ‘자규’에다 비유했을 것이다. 고향 성주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만년의 고뇌와 심경을 배꽃과 달빛, 그리고 소쩍새의 울음소리에 내포시켰다. 지금은 어떤가. 정계에서 배척당하면 고향을 저버리고 외국에 피신하는 세태다.

 따라서 위정자에게 이 ‘다정가(多情歌)’를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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