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6:36 (화)
미래의 생존이 걸린 일
미래의 생존이 걸린 일
  • 김혜란
  • 승인 2016.04.27 2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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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한 모임에서 만난 교수 한 분이 회의 내내 고개를 내저었다. 가족관계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러니까 조손 간의 갈등이 어느 정도냐는 내용이었는데, 조사결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갈등이 전혀 없다는 답이었다는 것이다.

 갈등이 없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했더니 정색을 하신다. 갈등이 없는 이유가 오히려 문제였다. 관계가 좋아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조부모와는 아예 만날 일도 갈등할 일도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의 자녀들은 조부모를 만날 기회가 일 년에 얼마나 될까. 같이 살지 않는 이상, 명절에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럼 2번은 된다. 생신이나 휴가 때 찾아뵙는 경우는 꽤 많이 만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시험이나 취업준비 핑계로 명절의 만남조차 그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은 조부모를 만나는 일보다 시험이나 취업이 몇백 배 더 중요한 나라니까.

 다문화 가족, 즉 동남아에서 온 이주여성들의 2세들이 꽤 나이가 들었다. 경남만 해도 군대 다녀온 자녀들도 있고 중고생, 즉 사춘기인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중 엄마의 조국으로 가려는 아이들이 숫자가 제법 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해서인 경우가 많은데, 혹시 따돌림을 당하거나 폭력을 못 견딘 것인지 알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따돌리지도 않았고 때리지도 않았다. 단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주민 2세 친구들에게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친구도 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10대 중반인 이주민 2세 아이가 스트레스로 뒷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엄마 나라로 가고 싶어요.”

 중국을 비롯, 특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효(孝)’를 국가와 백성들 삶 자체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왔다. 듣는 순간 고리타분할 것이다. 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같은 개념으로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저 ‘효(孝)’를 이용해 백성을 자신들 뜻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국가 권력자들의 오랜 패착이, 서양에서는 만날 수조차 없는 훌륭한 삶의 철학을 일그러뜨려 놓았다. 그 결과로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가족의 범주에서 이미 오래전에 밀려나 버렸다.

 정리하고 넘어가자. 효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것이 아니다. 충성개념은 더더욱 상관없다. 권력자가 백성들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먼저 베푸는 사랑의 개념이다.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더 나가면 수평으로, 전방위로 펼쳐야 할 철학 개념이자 관계의 해답이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라고 배운 기억이 난다. 수천 년 동안 배워 온 덕택에 똘똘 뭉쳐서 잘 살기도 했지만 그 ‘혈통’ 개념은 괴물이 돼 살아남았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좀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게 됐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낯선 존재이자 상관없는 남처럼 만들어 버렸으니까.

 오래전에 떨쳐 버렸어야 할 단일민족의 허상 역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더 나은 시대를 열어야 하는 아이들 생각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핏줄로 단결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서 관계 맺어야 할 시대다.

 자신과는 다르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수없이 만나 다양한 문화를 나누고 배워야 할 아이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관계 맺기 자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울타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들에게도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주고 있다.

 한반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긴 시간 동안 자신만 알도록 가르쳤고, 한 발 더 나가서 부모세대처럼 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부모보다 무조건 잘나야 한다고 가르친 일은 혹시 부모세대를 우습게 생각하도록 만든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는 다른 것을 구분하고 받아들이는데도 차별을 둔다. 경제 대국에 대해서는 이미 모든 분야를 받아들이고 모방하며 오히려 그들보다 더 ‘오리진’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 외의 나라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들의 문화가 어떠하고 그들의 삶이 어떤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경제 잣대로만 사람들을 평가하고 받아들이게 가르친 결과는 오히려 그 일의 미래마저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최우선 과제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게 됐다. 미래에도 먹고 살려면, 먹는 일 외의 일도 누리고 살려면,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새로운 나 자신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놓쳐 버렸다.

 그러니까, 기본을 놓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아이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줘야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식이고 다른 누군가의 이웃이자 친구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미래의 생존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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