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7:22 (목)
망상의 터널 (2)
망상의 터널 (2)
  • 이영조
  • 승인 2016.05.18 0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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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조 동그라미 심리상담센터장
 오늘도 상담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뜨거운 물에 커피 몇 알을 타서 만든 알 커피를 마시며 커피 잔에서 퍼져 나오는 달콤한 커피 향과 함께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저녁 7시. 지난주에 망상의 두려움을 호소했던 학생이 약속된 시간에 정확하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들어서는 민철(가명) 학생은 아직도 상담실이 낯선 모습이다. “그래, 어서 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따뜻한 녹차 한잔을 타서 건네주고 비스듬하게 마주 앉았다. “잘 지냈어?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보냈어?” 궁금했던 안부를 물으니 지난주 학교와 집에서 생활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역시 CGRT 자아발견에서 분석된 것처럼 말을 참 잘하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이야기한 많은 말 중에서 제일 관심이 가는 것은 망상에 대한 고통이었다. “역시 망상으로 힘들었나?”하고 물으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네~ 힘들었어요”하며 그 당시 생각을 떠올리며 상기된 얼굴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래놀이실로 들어갈까?” 둘은 모래 상자를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모래 놀이를 하는 방법과 순서를 설명해 줬다. 학생은 눈 앞에 펼쳐진 피규어 진열장에 전시된 수많은 피규어들을 돌아보며 만져보기도 하고 때로는 ‘와~’하고 작은 소리로 탄성도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놀 생각에 자신의 걱정도 잊고 있었다. 한참 동안 피규어 전시대를 돌아본 뒤에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이제 시작을 해 볼까?” 약간 들뜬 목소리로 “네~”라고 즐거운 톤으로 대답한다. 모래상자 뚜껑이 열리고 하얀 모래가 드러났다. 민철은 모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엄지와 검지 두 개로 모래를 집어서 비비고 있다. 양 손가락의 마찰로 인한 까칠한 느낌이 뇌를 자극하고 있다. 잠시 후 그는 손 전체를 이용해서 모래를 만지기 시작하더니 두 손에 가득히 모래를 퍼 올려서 아래로 흘려버리는 동작을 반복하고 모래를 양손으로 비비며 모래에서 전해오는 촉감을 즐기고 있고 필자는 그가 모래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규어를 하나 가져와서 모래 상자에 놓는다. 첫 번째로 가지고 온 커다란 식인 상어를 한쪽 구석에 놓더니 모래밭을 헤엄쳐 다니기 시작했다. 오가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모래상자에는 피규어들이 하나씩 채워졌다. “이제, 다 했어요!” 모래상자에는 상어와 고래들이 바다에서 유영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 옆에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멀리서 혼자 놀고 있다.

 모래 상자에 만들어진 모습에 관해 설명을 해 달라고 했더니 고래와 상어들이 모두 친한 친구인데 함께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 옆에 작은 물고기는?”하고 물었더니 마치 자기 모습 같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는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친구들 앞에서 내 모습이 이랬나 봐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모래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제가 친구들에게 당당해질 수 있을까요?” 자기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현재 민철은 자신감을 회복시켜줘야 한다. 이렇게 불편한 상태에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대등한 관계는 사라지고 자존감은 점점 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상담을 잠시 중단하고 밖에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상담하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우리 달리기를 하면서 기분 전환 좀 하자”, “예?” 의아해하는 외마디의 말을 무시하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길거리에서 잠시 망설이던 민철이도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언제 따라왔는지 훅 앞질러 달리고 있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참을 달렸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머리는 맑아지고 기분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가로등에 비친 겨울나무는 앙상한 가지들이 하늘로 제멋대로 솟구치는 것을 내버려 두면서 생명에 자유를 불어넣는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몸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어느새 추위는 사라져 버렸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입안으로 한가득 밀려들어 왔다. 기분 좋은 뿌듯함이 밀려온다. 무언가 결단을 하고 실행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희열이다.

 말없이 앞서 달리고 있는 민철이를 불러 세웠다. “잠시 걸을까?” 둘이는 걸으며 가빴던 호흡을 정리했다.

 “기분이 어때?”

 “괜찮아요. 처음에는 ‘갑자기 뭐하는 거지?’하고 의아했는데 선생님과 같이 뛰다 보니 우울하고 처져 있던 기분이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좀 더 속력을 내서 달려보니 그 기분은 어느새 즐거움으로 바뀌네요. 그리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자신감이 가슴속에서 꿈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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