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2:19 (금)
朴達嶺(박달령)
朴達嶺(박달령)
  • 송종복
  • 승인 2016.05.18 2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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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朴:박 - 성 達:달 - 다다르다 嶺:령 - 고개

 박달령을 박달재, 박달산(朴達山), 박달현(朴達峴), 박달치(朴達峙)라고도 부른다. 제천시에서는 이 전설 속의 인물들을 ‘박달과 금봉’이라는 캐릭터로 마스코트화 하고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 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중략)./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이 노래는 1948년 박재홍이 ‘박달과 금봉’의 사연을 담아 ‘울고 넘는 박달재’로 불렸다. 이는 서민적인 정서와 국민적 공감을 얻어 애창되고 있으며, 최근 KBS ‘가요무대’에서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로 손꼽히고 있다.

 이 박달재 사연은 조선 중기 영남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 도령이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는 도중,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동마을에 이르자 해가 저물어 한적한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마침 그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瓜年:16세)한 딸이 이었다. 뜻밖에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박달은 금봉의 청초함에, 금봉은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연민의 정이 들었다. 둘의 ‘로맨스’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이몽룡과 춘향이’,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미팅’을 하고는 훗날을 다짐하고 작별했다.

 금봉은 그날부터 박달을 사모하며, 매일 고갯마루에 올라 성황당에서 기도하다가 결국 상사병에 걸려 죽는다. 그 후 한양에 온 박달도 금봉이가 보고 싶어 매일 밤 시(詩)만 짓다가 결국 과거에 낙방하고 만다. 이제 낙방거사가 된 박달은 금봉이 만나러 그 고개를 찾았다. 고개에 도달하자 금봉이 죽었다는 사연을 듣고는 그리워하다가 환상 속에서 금봉이를 만난다. 너무 기쁜 나머지 포옹하려는 순간에 금봉은 사라지고, 그때 박달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 죽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됐다.

 이 박달령을 일명 박달재, 박달산(朴達山), 박달현(朴達峴), 박달치(朴達峙)라고 부르는데, 요즘은 천등산 박달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또한 고려 고종4년(1217) 7월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 고개를 지나는 국도변에 박달재 휴게소를 설치하고, 또한 노래비와 그들의 애처로운 사랑을 그린 조각 작품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래를 계속 울러 주고 있다.

 요즘 제천시에서는 이 전설 속의 인물인 ‘박달과 금봉’을 ‘캐릭터’로 ‘마스코트’화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고장은 전국 최초의 ‘국제결혼’, 시초라는 ‘차의 재배’, 임란 때 최초의 ‘의병흥기’, 최초의 ‘광복행진곡’ 고취 등 수많은 역사가 많은데 이런 문화를 시민에게 홍보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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