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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門(독립문)
獨立門(독립문)
  • 송종복
  • 승인 2016.05.25 2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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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獨:독 - 홀로 立:립 - 세우다 門:문 - 문

 사대의 예로 지은 모화관과 영은문을 철거하고, 이곳에 민족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국기(國旗)도 국가(愛歌)도, 국화(國花)도 이에서 비롯된다.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19세기 말 민족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조선시대 중국은 우리에게 ‘상국(上國)’으로, ‘대국(大國)’으로 섬겨야 할 ‘사대(事大)’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대외교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빈관과 은혜를 베푼 상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영은문이 있었다. 독립문이란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미의 문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당시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주장했다. 그는 파리 개선문을 직접보고 스케치했고, 스위스인 사바친이 설계하고, 조선인 심의석이 공사를 완성했다. 높이가 15m로 이 공사에 처음 철근을 사용했다.(1896년 11월 21일-1897년 11월 17일). 완성된 독립문 이맛돌에는 황실문장인 오얏(자두) 꽃무늬가 새겨졌고, 이 문의 앞뒤 각각 ‘독립문’과 ‘獨立門’을 음각하고, 그 좌우에 태극기 무늬를 새겨 넣었다. 3ㆍ1 운동 때 부른 <대한독립만세>의 국기는 이 독립문의 태극기를 보고 그렸다. 한편, <애국가>도 독립문 준공식 때 부른 노래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서 따왔다.

 일제는 이 문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며, 독립문 사이로 전철을 놓아 전차가 오가며 지축을 흔들어 혼을 빼어 버렸다. 뿐만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고, 이후 1966년, 1969년, 1971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그런데 1979년에는 성산 고가도로 공사로 달랑 들어 서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했다. 도대체 이를 수가 있는가. 필자가 지난 1987년 전국민방위강사 7명을 대동해 이태리 로마에 가보니 고속도로가 원을 그리며 달렸다. 그 이유를 물으니 고속도로 건설 중에 고대 로마 유적이 나왔다 하여 둘러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필요하면 유적보호라 하고, 걸리면 해치우는 것을 보니 말로만 조국, 애국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때는 교통 표지판에 ‘Dogribmun’이라고 써 놓았다. 외국인의 눈에는 ‘개(dog) 갈비뼈(rib) 문’이 된다. 다시 ‘Tongnimmun’을 고쳐 쓰고, 현재는 ‘Dongnimmun’이 됐다. 그뿐인가 1970년대 초에는 ‘여성용 빤쓰는 독립문표, 남성용 빤쓰는 쌍방울표’라는 ‘화장실 유머’도 등장했다. 빤스는 일본어고 팬티는 영어다. 이는 오줌과 똥의 잔여 찌꺼기를 받아내며, 방귀, 냉, 땀을 걸러내는 옷이다. 이 독립문을 언어까지도 모독했다. 언제 독립문을 제 자리에 옮겨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또한 독립문을 이용한 상술은 없어져야 할 때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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