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斥和碑(척화비)
斥和碑(척화비)
  • 송종복
  • 승인 2016.06.29 2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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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斥:척 - 물리치다 和:화 - 화의 碑:비 -돌기둥

 고종(1871)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과 화합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전국 200여 곳에 세웠으나 거의 땅에 묻혀 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34개에 달한다.

 조선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1863)에 오르자, 그의 친부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서양열강들은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몰려와 통상을 요구하며, 심지어 무력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때 대원군은 조선왕조 질서유지를 위해 외국과 수교나 통상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세웠고, 이를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1871년 4월에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으로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의를 해야 하고 화의를 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또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란 작은 글자로 ‘우리들의 자손만대까지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그러나 10년 후 임오군란(1882)으로 그는 청나라로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거나 땅속에 파묻었다.

 지금은 34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열거해 본다. 서울의 비는 1882년 보신각 부근에 묻힌 것을 1915년 6월에 발굴해 중앙박물관에, 부산의 비는 1924년 발견돼 용두산 공원에 뒀다가 1978년에 부산시립박물관에, 진해의 비는 부산 강서구 천가초등학교에, 강화의 비는 덕진진 남단에, 경주의 비는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고창의 비는 고창읍에, 구미의 비는 구포동에, 군위의 비는 군위읍에, 기장의 비는 부산 기장읍에, 남해의 비는 설천면에, 대구의 비는 남산동 관덕정에, 밀양의 비는 밀양박물관에, 봉화의 비는 봉화읍에, 산청의 비는 산청읍에, 성주의 비는 성주여고에, 순흥의 비는 순흥면에, 신창의 비는 아산시 신창면에, 양산의 비는 상북면에, 여산의 비는 익산 여산면에, 연기의 비는 세종시 연기면에 보존돼 있다.

 또한 영양의 비는 영양군청에, 예천의 비는 대흥면소에, 옥천의 비는 옥천읍에, 용궁의 비는 예천군 용궁면에, 운현궁의 비는 운현궁 유물전시관에, 장기의 비는 포항시 장기면에, 절두산의 비는 절두산 순교지에, 창녕의 비는 만옥정 공원에, 청도의 비는 화양읍에, 청송의 비는 청송읍에, 청주의 비는 상당구 중앙공원에, 포항의 비는 칠포리에, 함양의 비는 옛 안의면소에, 함평의 비는 기각리에, 홍성의 비는 구향면에, 천안의 비는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북한에는 아직도 이 척화비 발견소식이 없다. 쇄국은 국가의 문호를 잠그고 우리의 전통만 옳다는 고지식한 짓이다. 지금은 ‘글로벌’ 국제시대이니 이 척화비를 거울삼아 다시는 고풍에 너무 얽매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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