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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왜 왜곡이 심한가?
우리 역사는 왜 왜곡이 심한가?
  • 송종복
  • 승인 2016.07.18 2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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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제대로 기술되지 못하고 만신창이(滿身瘡痍)이 됐는가?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침략 속에 사서(史書)가 소각해 버렸고, 그들의 왜곡된 역사기록으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의 맥과 뿌리를 왜곡시켰다. 그래서 우리역사는 삼독(三毒)에 걸렸다고 본다. 즉, 사대주의 사관에 젖은 중독(中毒), 식민주의 사관에 빠진 왜독(倭毒), 실증주의 사관 랑케에 빠진 양독(洋毒)에 왜곡됐다.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가 왜곡된 것은 중국ㆍ일본에 의해서 말살된 원인도 있지만, 우리 사가(史家)들이 많이 왜곡시켰다.’고 했다. 즉,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 김견명(법명: 일연)의 ‘삼국유사’, 조선 서거정의 ‘동국통감’에서 왜곡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김부식은 고려 인종(1135년)때 묘청의 자주적인 서경천도운동을 타도시켰다. 이어 사대주의 학자들이 집권하면서, 고려를 중국의 정신적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왜곡은 내용은 ①중독(中毒)이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一千年來)의 대사건’이다.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집권하자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을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꿨다. 우리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시대주의의 노예가 됐다. 조선은 유교의 영향아래서 중국을 천자로 받들고, 중국인을 상전으로 모셨다. ②왜독(倭毒)이다. 한말 일제강점기(35년간) 때 일제에게 피맺힌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에 ‘취조국’을 두고, 1910.11-1911.12월까지 서적 51종 20여만 권을 약탈해 소각시켰다. 당시 경복궁에서는 책 태우는 냄새가 3일 동안 났다고 한다. 1922년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했다. 이때 일인 금서룡(今西龍)의 ‘단군고(檀君考)’에 단군왕검을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우리를 곰의 자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편찬에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이완용, 박영효 등이 가담했다.

 1919년 3ㆍ1독립운동 후에 사이토 마코토(제등실: 齊藤實) 총독은 ‘교육시책’에서 조선인의 사대, 무위, 무능, 의존, 악행 등을 들추어내어 후손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조상을 무시하고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돼 반(半) 일본인이 된다고 했다. ③洋毒이다. 근래에 서양에 유학 갔다 온 역사학자들은 실증주의 사학(랑케사학)을 주장했다. 즉, ‘유물이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주 무대는 중국이다. 중국에는 고고학 자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걸 갖다 쓴 것이 하나도 없다. 짧은 역사는 가능한 방법이나 5천년이 넘는 우리나라는 이런 역사증명은 상당히 위험하다. 광복 후 미군정시대 교육은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주입하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비합리적, 미신적,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했다.

 이러한 삼독(三毒: 중독ㆍ왜독ㆍ양독)의 왜곡과정에 우리의 정신은 극심히 오염됐고, 수많은 열등감과 패배의식(敗北意識)에 젖게 됐다. 역사는 철학, 인류학, 언어학, 서지학, 연대학, 고고학 등의 복합 학문이다. 이같이 다방면 방법론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은 증명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학은 19세기 잠시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방법론인 실증주의 역사방법만을 고집했기에 우리의 역사는 왜곡이 심하다. 다시 삼독을 버리고 한 민족에 맞는 올바른 역사의 정립을 이번 국정국사교과서에는 그 사유를 철저히 밝혀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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