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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作路(신작로)
新作路(신작로)
  • 송종복
  • 승인 2016.07.27 2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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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新:신 - 새로운 作:작 - 짓다 路:로 - 도로

 최초의 신작로는 군산항-전주까지이다. 개통식은 1907년 친일총리 이완용이 인천 제물포에서 서양마차를 화륜선에 싣고, 군산항에 내려 그 마차로 처음 시주했다.

 경상도 민요에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에 신작로와 하이야[택시]가 나온다. 즉, 신작로 넓은데 하이야[택시]가 놀구요/ 하이야 복판에 신랑신부가 논다/ 너 년이 잘 나서 일색이 아니라/ 내 눈이 어두워 한강수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나오는 ‘신작로’와 ‘하이야’는 일제강점기에 출현한 괴물이다. ‘길[道]’이란 인간이 통행하기 위해 뚫어 놓은 통로이고. ‘도로(道路)’란 수레나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닦은 인공적인 통로를 말한다.

 1897년 발간한 최초로 한글판인 <독립신문>에 전국의 미개한 교통을 한탄하며, 도로개발의 중요성을 게재했다. 즉, ‘국중(國中)의 도로는 인체의 혈맥과 같으니라. 고로 혈맥이 옹폐하고는 장수하는 자가 없고, 도로가 협소하고 험난하면 잘되는 나라가 없나니, 아국(我國)의 금일 잔악한 형세는 상하로 정이 불통함이니라. 정이 불통함은 도로가 험잔 함이라. 비록 500년 국도(國都)에서 불과 10리 되는 오강(五江: 마포, 서강, 용강, 용산, 광나루) 길도 험하고 추하고 협소하야 거마의 왕래가 불편하나니, 한강을 10리 지척에 두고 있는 도성의 길조차 이처럼 험해 무역과 왕래를 방해하니 참으로 한심하도다’라고 했다.

 일제는 1906년 동감부에 치도국(治道局)을 두어 도로를 개설했다. 이는 우리나라 오솔길을 넓힌 것이 아니라 농작물의 착취수송을 위해 새로 만든 도로이며, 이를 ‘신작로’라 불렀다. 1907년 제1차로 ①군산∼전주 ②목포∼광주 ③진남포∼평양 ④대구∼경주간이다. 1908년 제2차로 ①공주∼소정리 ②수원∼이천 ③마산∼진주 ④해주∼용포간이다.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는 군산과 전주간의 도로이다. 이는 호남의 곡물을 수탈해 군산항까지 마차로 수송해 일본까지 보내기 위해서다. 이의 개통식은 친일 총리인 이완용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는 인천 제물포에서 서양마차를 화륜선에 싣고, 군산항에 내려 그 마차로 처음 시주했다.

 이어서 서울의 성곽을 헐고 신작로를 성 안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1911년 왕실과 총독부에서 자동차를 도입해 자동차 시대가 열리고, 1915년부터 지방과 연결하는 신작로가 개통됐다. 이는 주로 일본인이 사는 곳이나, 군사적 경제적인 목적에 필요한 곳에만 만들었지, 우리가 필요한 곳에는 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며칠 전 울산과 서울까지 16분 만에 질주하는 열차가 생긴다니, 1세기도 되기 전에 오솔길이 신작로로, 고속도로, 항공로로 바꿔 드니, 이제는 ‘꿈의 도로’가 실현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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