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1:34 (토)
조상제사, 왜 지내나
조상제사, 왜 지내나
  • 송종복
  • 승인 2016.09.12 2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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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중국에서 전래 이후 변화
횟수 세계에서 가장 많아
미풍양속ㆍ효도방법 치중

 지난 1999년에 모대학 K교수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에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로부터 갖은 협박과 항의를 받고는 성균관에 유감의 뜻을 전달하고, 이 책에 대한 유림의 반박문까지 실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성균관과 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해 많은 성현을 모시고 매월 삭망(朔望)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에 유교의 출발은 원래 사기였으므로, 이를 계승한 공자나 맹자, 또 이들을 이어받은 주자도 우리사회 곳곳에 자라고 있는 ‘곰팡이’에 비유했다. 따라서 그는 공자를 ‘거짓말 쟁이’라고 하고, 조선 500년은 ‘공자바이러스’에 걸렸다고 했다. 따라서 유교가 우리나라에 끼친 폐해를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저술했다.

 필자가 중국 산동성 제남시 재정재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금ㆍ토요일마다 주변의 유교사적지를 답사했다. 곡부에 있는 공자묘에 가보니 어수선한 분위기며 주위담장을 재건축하고 새 단장을 한 것을 보았다. 이유를 물으니 지난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당시 주석이던 마오쩌둥(모택동)의 제창으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일어났다. 공자사상이 문제였다.

 이유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과 중국 사회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공자사상이라고 하며,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일어나서 공자궁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는 중국 순(舜)이 요(堯)의 아들 주(朱)에게 제사지내라고 명한 것이 시초다. 그 후 은(殷)나라에서 조갑이 ‘쿠테타’로 왕권을 잡은 뒤 제사문화를 새로 정비했다. 조갑은 황하신, 천신, 토템 등에 대한 제례를 없애고, 자신의 직계 혈족에게만 제사를 지내게 했다. 반면에 종래의 지내던 조상신은 전쟁, 농사, 날씨, 질병 등을 조절하는 초월적인 신으로 만들었다. 이때 조갑의 조상숭배 제사를 반대하던 주변 연합국이 은나라를 멸망시킴으로 다시 조상숭배 제사가 시작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고려 충렬왕 때 송의 주자학이 전래 되면서 조상제사도 함께 유입됐다. 이때는 지금처럼 죽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종손을 높이는 의미에서 제사형식의 예를 갖추었다. 조선 태조(李旦)는 정권탈취로 도덕성이 상실되자 민심을 바로잡아 정권유지의 묘책으로 무학대사의 ‘아이디어’로 조상제사를 권장했다. 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는 천재지변이나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늘과 땅, 나무, 산, 바다, 조상 등에게 절차를 갖추어서 빌었다. 이같이 자연변화나 질병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져 온 제사는, 근세에 이르자 차츰 유교적인 조상숭배의 제도로 변모했다.

 ‘예서(禮書)’에는 ‘제왕은 하늘을 제사지내고, 제후는 산천을 제사지내며, 사대부는 조상을 제사지낸다’고 했다. 선초에는 불교의례가 강하기 때문에 유교의례는 쉽게 보급되지 않았다. 16세기 중엽부터 성리학이 심화 되면서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에 따라 4대조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요즘은 2대조까지 간소화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지내기도 한다.

 이런 풍속이 ‘우리도 조상이 훌륭하다’고 여기며, 왕의 허락 없이도 나중에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 ‘제사’는 우리민족의 미풍양속도 아니며 효도의 방법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제사횟수가 많다. 살아생전에 불효하고, 돌아가신 후의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보기 위한 자기기만이나 자기만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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