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2:43 (금)
기초와 기다림의 문제
기초와 기다림의 문제
  • 김혜란
  • 승인 2016.10.05 22: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 공업대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일본은 자연과학분야로 22번째, 생리의학상은 4번째 수상이다. 고집불통으로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분야에 돈 쓰고 힘 쏟을 때도 묵묵히 지켜주고 밀어준 일본이 부러울 뿐이다.

 한국은 하나도 못 받은 노벨과학상을 수십 개나 받는 일본을 대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나라니까. 돈이 많으니까.”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도 학술이나 과학 연구에 대주는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기초과학보다 응용과학분야에 대부분이 투자된다. 그러니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고 빨리 나오는 결과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겁한 변명만은 아닐 것이다.

 과학저널 네이처도 올 6월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현황을 분석한 뒤 한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이유를 발표했다. 기초연구에 대한 장기적 투자에 인색한 점과 경직된 연구실 문화가 그 이유라는 것이었다. ‘빨리빨리’와 군사정권시대 문화가 학문연구 분야에도 작동되고 있었나 보다.

 10대 시절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시험 성적은 괜찮았던 적이 있다.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수업시간에도, 방과 후에도 공부라고는 하지 않는 아이가 왜 성적은 그런대로 나올까. 아이큐가 좋은 걸까. 집에서 잠 안 자고 밤샘할까. 다 아니었다. 아이큐도 썩 좋지 않았고 잠도 많았다.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별명도 ‘찍기여왕’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영어도 그렇고 수학도 그랬다. 기초성문영어, 공통수학을 그나마 많이 보았던 것 같다. 학교진도와 상관없이 남들은 저 앞쪽 진도 빼고 있는데도 그저 이게 무슨 뜻인지, 왜 그렇다는 것인지가 이해 안 돼서 늘 그것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으로 공부는 끝이었지만…. 그 당시 잠을 자면 사다리 맨 아래에서 사다리 밑 흙바닥을 파헤치는 꿈만 꿨다. 국어는 ‘레몬 북스’(로맨스 소설)부터 뜻도 모르는 ‘데미안’까지 그냥 읽기만 했다. 죽자고 공부 안 한 것치고 4년제 대학을 졸업이라도 한 것은 늘 기초를 고민했던 성격 탓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노벨상에 대한 가치 혹은 기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기초과학분야에서 상을 많이 받는 일은 별로 의심도 들지 않고 인정이 된다. 그들은 기초의 가치를 알고 기다려줄 줄 안다. 지금도 한국의 대학에서는 의대와 공대, 경영대만 제외하고는 과를 없애고 정원수를 줄이고 있다. 철학과나 사회학과, 역사학과 등등의 기초학문을 다루는 과가 사라지기 시작한 지 꽤 됐다. 다른 과로 병합, 흡수되기도 했다. 취업을 위한 자기계발 연구소를 학내에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캠퍼스를 떠난다. 확신하건대, 기초학문이나 기초과학들을 돈 안 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어떤 이는 대한민국은 먹고 살기 바빠서 기초과학이나 결과가 늦게 나오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활은 제대로 되고 있는가. 꿈에도 상상 못한 지진이 경주에서 났다. 지금도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공포감에 휩싸였다. 정확한 원인이나 다음 지진에 대한 예측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더 불안하다.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서 잊어버릴 만하면 지진이 나는데도 우리는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 한반도도 세월이 지나면 섬이 될 터이고, 섬이 되는 과정에서 일본처럼 지진이 심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생각 못했을까. 일본과 같은 조산대에 속한다고도 배웠는데 말이다.

 건물 내진설계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다행히 80년대 후반부터 내진설계를 하지 않으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이 내진설계가 돼 있다는 결론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불안하다. 설계가 제대로 돼도 시공할 때 설계대로 자재를 쓰지 않은 건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계와 자재선정은 건축과 건물의 기초이자 기반이다. 다시 점검하고 수선하고 마련해야 한다.

 이번에 생리의학상 받은 일본의 오시마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학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백년 후 일지도 모른다’고.

 대한민국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랑스럽다. 그런 자부심이 어쩌다가 기초학문과 기초과학에 대한 100년의 기다림도 용납 못하는 사회가 됐는지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 기초가 문제이고 기다림이 문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