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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여왕 3명 치정을 살펴보니
신라 여왕 3명 치정을 살펴보니
  • 송종복
  • 승인 2016.11.07 2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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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역사상 여성이 왕위에 오른 예가 몇 명 있다. 중국은 당(唐)의 7대 측천무후(624)가 유일하며, 일본은 비미호, 일여, 추고, 황극, 효명 등 8명이나 됐다. 우리는 신라 때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즉, 27대 선덕여왕(632), 28대 진덕여왕(647), 51대 진성여왕(887)이다. 27대 선덕여왕은 강함을 포용한 ‘리더십’을 발휘했고, 28대 진덕여왕은 외교력을 발휘해 통일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나, 51대 진성여왕은 치정의 관계로 정치적 ‘리더십’없이 망국으로 치달았다.

 제27대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26대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화백회의에서 성골 여자를 추대하는데 선덕여왕이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여자라는 이유로 고난이 많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선덕왕조에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약소국인 신라가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는 것은 성공한 여왕이다.

 또 당 태종은 신라의 여왕을 조롱한 바 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비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당의 내정간섭을 꾹 참고 태종에게 <태평송>을 보내어 달랬다. 또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여왕이 황룡사 탑을 구축하는데, 너무나 많은 돈을 썼다. 그런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기록이 있다.

 제28대 진덕여왕은 8등신이다. 그의 풍만한 몸매에 장신으로 소위 ‘글래머’이다. 손을 내리면 무릎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아주 나약하고 사치만 일삼았다. 김춘추가 당에게 굴욕적인 외교를 조종했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이런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여왕은 입지가 좁아지자 김춘추에게 선위하고 물러났다.

 제51대 진성여왕 때 백제의 침공을 받아 100여 개의 성이 함락됐다. 이 때문에 진성여왕이신라왕조가 무너지게 만들었다고 꼽는 사람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즉위 2년째 ‘여왕은 숙부이자 애인인 위홍이 죽자 미남들을 끌어들여 음란하게 놀고, 그들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맡겼다. 이들이 방자하게 굴어 뇌물이 공공연히 돌고, 상벌이 불공정해져 기강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아첨과 뇌물이 흥행해 국가기강이 무너지는 운명을 자초했다. 김견명의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을 보면 여왕의 주위에 3~4명의 측근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 정치가 혼란해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더 버티지 못한 여왕은 즉위 11년째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살아서 왕위에 물러난 유일한 경우였다. 요즘 말로 하야(下野)한 셈이다.

 지금은 어떤가. 신라 여왕의 통치 후 1천100년이나 지났다. 천여 년 만에 다시 여성의 국왕 ‘대통령’을 맞이했다. 그는 선친의 후광을 받았고. 또한 독신녀라는 ‘메리트’에 국민들의 호감이 대단했고 또한 희망도 벅찼다. 그동안 티 없이 외교도 잘했다. 또한 형제 친척을 배제해 청빈했다. 그런데 보통 실세는 자녀나 형제, 아니면 인척이 판을 쳐 왔다. 이번에는 이례적이다. 실세도 아닌 자가 뜻밖의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참모들이 참모의 본분에 문제가 있었다. 앞으로는 실세가 친인척이 아닌 제3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성각오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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