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7:27 (금)
끊어내야 산다
끊어내야 산다
  • 김혜란
  • 승인 2016.11.16 2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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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100만 촛불이 바다를 이룬 날, 굽은 나무는 선산을 지켰다. 주말도 일하는 직장의 특성상, 광화문 대신 창원 정우상가를 찾았다. SNS를 통해 ‘촛불번개’가 있었다. 5시 30분쯤 양초를 사서 갔다. 주최 측(?)은 모두 서울로 가서 양초와 피켓을 손수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 6시가 다 돼 가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온 지인은 6시가 지나자 집으로 돌아간다는 문자가 왔다. 우리끼리 그냥 촛불 들어도 될 텐데….

 10여 분이 지나자 밝은 빛이 시청 후문 건너편부터 비쳐왔다. 어두운 구석을 비추며 광명처럼 밝아왔다. 누군가 먼저 촛불을 밝힌 것이다. 주최 측 없는 순수 시민들만의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삽시간에 100여 명도 넘게 촛불을 들었다. 진행자가 따로 없어 두런거리고 있는데, 야무진 여성 한 명이 여러 촛불집회를 다녀봤다면서 사회를 보겠단다. 사람들을 앉히고, 구호를 정해 외치게 하며 분위기를 잡아냈다.

 서너 살 꼬마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모에 중년여성들, 중ㆍ고등학생에 대학생,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람들이 머뭇거리면서도 결심을 한 듯 앞으로 나선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들먹이며 재벌해체를 외치는 개인사업자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는 중년여성 동창들, 며칠 전에 제대했다는 민간인 3일차 청년도 외친다. 퇴진하라고. 보수당에 표 찍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끄러워서 촛불 들고 나왔다는 사십 대 직장인, 남편과 투잡으로 밤낮없이 십 년 넘게 뛰지만 달라진 것 없는 살림살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여성….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가 촛불에 녹아들고 있었다. 회사로 들어와 진행하는 방송(TBN창원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 중에도 문자로 광화문 일대 ‘촛불의 바다’ 사진을 전송하는 청취자도 있었다. 광화문에서 촛불 행진을 하면서 스마트폰으로는 창원교통방송을 청취한 것이다.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촛불바다를 보고 있으니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순자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물의 힘으로 배가 뜨지만 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성난 촛불의 바다가 방향을 못 잡고 떠 있는 배를 뒤집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띄운 배를 왜 우리 손으로 뒤집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후일을 더 많이 의논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바다에 새로운 배를 띄워야 한다. 그런데 그 배는 앞으로 괜찮을까. 아무 일 없이 순탄하게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 순항할 것인가.

 그동안 우리가 띄운 배들은 늘 위태로웠다. 6공 황태자, 소통령, 홍삼트리오, 봉하대군, 영일대군들은 배 밑창에 연신 구멍을 뚫어댔다. 배들은 휘청거렸고 그렇게 된 책임은 당연히 배의 몫이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국가리더를 뽑을 때 무엇을 많이 따지는지 생각해본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국민은 결국, 리더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의지해서 표를 던져왔다. 청렴성과 정책 검증 역시, 보여주는 것만 할 수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들이 감춘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우리는 리더들의 실제가 아닌 가짜 이미지에 ‘시뮬라시옹(Simulation)’만 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뼈아프다. 솔직히 앞으로 뽑을 리더들도 믿을 수 없을까 봐 더 걱정스럽다. 그래서 검증 시스템을 전격적으로 촘촘히 바꿔야 하는 일이 시대적 사명 같아 보인다.

 대체 최순실 국정농단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기(史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에 나오는 글귀가 있다.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 당연히 처단해야 할 것을 주저(躊躇)해서 처단(處斷)하지 않으면, 훗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재화(災禍)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즉, ‘자르지 못하면 재앙이 온다’는 말이리라.

 여기서 ‘대통령이나 리더라면 반드시 그래야지’라고 고개 끄덕인다면 그야말로 오해다. 우리 국민들이 잘라내야 한다는 뜻이다. 리더를 뽑을 때, 늘 보여주는 이미지에 속았고, 그동안 믿어온 의리(?)에 주저했고,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더러운 정을 끊어내지 못하고 이어왔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작고 크게 일어나고, 결국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아프지만 살길은 있다. 옆집 아저씨라 해도, 40년 핏줄처럼 지낸 사이라 해도, 정치 리더로서 올바르지 않다면, 그 누구라도 끊어내야 한다. 바르지 않은데도 끊어내지 못한 죄,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잊지 말자. 자르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온다. 촛불의 뜨거움으로 그 질긴 정체를 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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