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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단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
머리단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
  • 신화남
  • 승인 2016.11.27 1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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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남 대한민국산업현장 교수
 옛 우리 선비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존두사상(尊頭思想)이라는 지극히 불합리한 습속이 있었다. 두상 존중의 습속은 머리를 소중히 여겨 하늘이나 조상, 임금, 부모, 스승 등 존장(尊長) 이 외에는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습속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정신적 집념은 선비들에게 있어 합리적인 것보다 강했고, 선비들의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한국인 고유의 가치관이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같은 정신적 가치에 그토록 매서웠던 것이다. 특히 선비들에게 있어서 존두정신은 자존심 그 자체였다.

 존두의 전통을 지킨 전형적인 선비를 꼽으라면 한말의 지사 단재 신채호를 들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세수를 할 때에도 빳빳이 선 채로 물을 퍼서 얼굴을 씻기 때문에 세수를 하고 나면 젖은 옷을 말리는 일이 아랫사람의 일과였다고 한다. 세수할 때에는 머리를 숙여 하라고 하면 세숫대야 같은 천한 물건에 고개를 숙이는 법도는 없다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이다.

 이러한 두상 존중에서 반드시 갖춰야 체면이 서는 것이 두발이다. 선비들은 물론 주로 상투를 틀었지만 선비도 죄인이 되면 상투를 풀고 산발을 한다. 이처럼 우리 옛사람들의 두발 양식은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 신분, 남녀구별, 나이, 혼인 유무, 직업, 경제력 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됐으며 행사의 성격이나 시대, 문화생활수준 등에 따라 변모해왔다.

 삼한시대의 머리 형태는 혼인 여부에 따라 차이를 뒀다. 미혼인 총각은 검은 끈으로 묶은 댕기머리였고, 처녀들은 하나로 묶어 늘어뜨려 붉은 댕기를 맸다. 기혼 남자는 주로 상투를 틀었는데 이는 성인이 됐다는 하나의 상징성을 나타낸 것이다. 여인들은 얹은머리와 쪽진머리를 주로 했다.

 고려 시대에는 신라 시대와 유사했지만 중기에 원나라에서 들어온 가체양식이 조선 시대에 들어서 신분과 부의 척도, 그리고 지위의 상징이 됐다. 이로써 조선 시대의 머리 모양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엄한 제한이 있었다.

 조선 시대 기혼 남자들의 머리는 전통적으로 상투머리였으나 천민은 자식을 낳기 전까지 상투를 틀지 못하고 산발을 하다가 이후 상투를 틀었다 하더라도 그 위에 망건 등의 관모(冠帽)를 착용할 수는 없었다. 기혼 여성의 경우 양반집 부녀자들은 어여머리를 해 신분을 나타냈으나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은 이 어여머리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혼은 댕기머리 등으로 획일화돼 머리 모양만 봐도 그 사람이 양인인지 천인인지, 기혼인지 미혼인지 구분이 쉬웠다. 여기에 갓이나 망건 등은 신분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직급 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

 반면 여성들은 가체가 크고 높은 머리 모양이 부(富)를 상징했다. 오늘날에는 아파트 평수나 고급 자동차, 명품 등으로 부의 정도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여성들의 가체를 높게 올릴수록 더 큰 부를 상징했다. 그러다 보니 가체의 크기가 점점 커져 사치가 심해지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조선 정조 때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이후 조선 여인들이 대개 쪽머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이 쪽머리도 궁중과 사대부가에서는 높게 올리고 화려한 비녀를 사용해 일반 부녀자들과 달리 신분 구별을 할 수 있게 했다.

 이후 남자들은 지난 1895년(고종32) 11월 16일 단발령이 공식 공포되면서 상투와 땋은 머리가 사라지고 머리털을 밑만 깎은 채 윗부분을 남겨 기르는 서양식 머리 모양을 하게 됐다. 여성들 또한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단발머리와 파마머리가 등장해 점차 서구식으로 변화해 갔다.

 지금도 머리 모양이나 길이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지만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남녀 구별 없이 각자가 개성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하기 때문에 머리 모양만 가지고 그 사람의 재력이나 신분을 파악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은 머리카락의 길이가 긴 반면, 남성은 대체로 짧은 편이며,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상징적으로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고, 요식업이나 간호사, 운동선수 등은 대체로 짧은 머리가 많다. 스님들의 삭발은 단순한 삭발,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머리카락이 길면 자연히 남을 의식해 손질을 해야 하고 잡념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과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탈모가 생기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기 때문에 탈모 방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신경을 쓴다. 그런데 조선 시대 때는 여성들 사이에 네모진 이마가 미인의 기준으로 여겨져 제모를 했고, 일부 남성들도 대머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대머리는 출세의 상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마가 넓으면 마음도 넓다는 속설이 있어 심지어 남몰래 머리털을 뽑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제 시대가 변해 두발 모양은 다양해졌지만 머리단장은 아직도 성별 구분을 가능하게 하고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의복이나 행사의 성격에 따라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갖추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청결하게 하고 깔끔하게 단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머리단장은 그 사람의 정신 상태와 문화 수준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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