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4:06 (금)
폐교 터 교적비
폐교 터 교적비
  • 안명영
  • 승인 2016.12.13 2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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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영 진주 명신고등학교장
 수안보 상록호텔을 숙소로 전직연수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여태 고개 숙여 발 앞만 보고 걸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여러 갈래 길이 나타나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갑갑하기만 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강의에 공감이 가고 아침저녁 온천욕으로 마음은 점차 안정돼 갔다. 인근 명승지를 탐방하기도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에 온천수가 샘솟는 이 장소는 이전에 무슨 용도로 사용됐을까.

 하늘재에 올랐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문경과 수안보를 이어주는 계립령(鷄立嶺) 길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진출을 위해 아달라이사금 3년(156)에 죽령보다 2년 먼저 열었다.

 내려오면서 미륵대원지를 찾았다. 하늘재 계곡천과 북으로 흐르는 개천 사이에 있다. 남북의 중요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둬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의 석벽 중앙을 감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해 장식했다. 경순왕은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싸우지도 않고 고려에 나라를 내주자 태자는 울분을 참지 못해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왕이나 부처는 남면하거늘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석불은 북쪽을 보고 있을까.

 마의태자는 금강산을 목표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하늘재를 넘어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북행길에 오른다.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신라를 부흥하겠다는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다고 추론되고 있다. 나라가 망하자 태자의 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역할로 인생을 전환하려 했다는 사실에 미래설계에 참고가 됐다.

 모교를 찾는 이유는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함이다. 뛰고 달리던 운동장이 좁아 보이고 걸상은 낮아 다리를 펴야 엉덩이를 걸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플라타너스의 높이는 오히려 작아졌다. 목조 건물은 콘크리트 건물로 되고, 도시락에 물을 붓고 난로 뚜껑 위에 얹어 데워 먹었는데 요즘은 학교급식으로 모두 따뜻한 식사를 하며 난로는 온풍기로 교체됐다. 교정을 한 바퀴 돌면 오늘의 힘든 일이 의미 있는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2월 달력을 대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나간 년도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시대의 흐름으로 시골 초등학교부터 문을 닫고 있다. 폐교를 찾으면 왁자지껄했던 교실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걸상은 어지럽게 놓이고, 유리창은 깨어지고, 고양이가 울타리를 넘나든다. 고목이 된 감나무 꼭대기에 집을 지은 까치마저 이방인을 경계하듯 울어댄다면 세찬 겨울바람에 맨몸으로 내몰린 기분이 아닐까.

 일과가 끝나면 주변을 산책했다. 식당 간판에 꿩의 그림이 흔하고 꿩 요리 종류도 다양하다. 숙소 앞에 소나무 사이로 꼬리를 치켜들고 있는 꿩의 조형물이 있고 그 옆에 자연석을 세우고 수안보 초등학교 유지비(水安堡 初等學校 遺址碑)로 새겼다. 폐교 교적비이다. 뒷면에 1921년 수안보 공립보통학교 개교, 1982년 6월 23일 58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이 터에서 3천99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안보리에 새로운 교사로 이전했다. 졸업생이 이 비를 보면 쓰다듬고 끌어안지 않을까! 폐교 터에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석고로 제작된 독서소녀상을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긴 칼을 세워 잡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어 당당하다. 독서하는 소녀는 두려움으로 얼굴이 하얗고 주변을 연신 살피는 듯하다.

 혼자 남겨진 소녀를 위해서라도 잘 보이는 곳에 학교 이름, 개교ㆍ폐교 연도, 졸업생 수, 교훈 등을 돌에 새겨 세우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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