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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대행, 황희를 본받아야
2016년 12월 19일 (월)
박태홍 7618700@kndaily.com
   
▲ 박태홍 본사 회장
 조선 시대에 황희라는 정승이 있었다. 고려 말에 태어나 그 시대에서도 관직 생활을 했으니 기구하고도 특이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고려는 멸망한다. 그러자 그는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뜻이 맞는 고려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풀뿌리로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며 세상사를 멀리한다. 이래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에 성공한 이성계(태조) 일파는 이들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를 무마하고 홀로 조선조정에 출사한 사람이 황희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또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이 그의 심사였다.

 그리하여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시며 18년을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으로 있는 등 정승의 반열에만 24년 재직한다.

 나이 30세에 조선조정에 출사, 90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57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치며 훗날 사가들에 의해 청빈의 대명사, 진정한 공직자의 본보기, 조선 최고의 명재상 등으로 추앙받고 있다.

 청빈한 삶은 민생 규휼에 녹봉을 환원했고 정사가 어지러울 때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당당하게 맞서는 정치가 또는 공직자로서의 참모습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했음이다.

 이방원(태종)의 처남 민무구, 무질 형제들의 조정 농단에 대해 상소를 올린다. 이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태종은 왕후 윤씨의 오빠들을 삭탈관직시킨 후 유배 보냈다가 죽이기까지 한다. 이는 외척의 폐단을 종식시키는 정치적 사건이기는 하나 자기 처남을 죽이면서까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태종의 결단이 황희의 상소를 바르게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황희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뻔했던 또 하나의 사건은 폐세자 사건이다. 태종(이방원)은 양녕대군을 다음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파행을 일삼아 태종의 눈 밖에 난 양녕대군은 결국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으로 바꾼다. 이때 이를 반대한 황희는 좌천되면서 유배까지 간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한 것일까? 세종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그리고 외숙을 죽음으로 몰아간 황희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그것도 의정부 참판으로 중용하면서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황희를 곁에 두고 정사를 펼쳤다.

 황희의 인간됨을 알 수 있는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후세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나라 백성을 위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기 집에서 부리던 어린 노비가 학문에 자질을 보이자 면천시켜주고 경제 지원까지 해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황희는 그 아이에게 “나중에 나를 만나도 아는 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근데 10여 년 후 과거장에서 황희를 만난 그 아이가 인사하는 것을 꾸짖고 뿌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사적으로 그 아이를 면천시켜주기까지 했지만 공적으로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일까? 황희는 세종 즉위 4년부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유학의 기본 정착, 윤리, 농업, 천문, 지리, 과학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한다. 세종은 조선개국 이후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면서 가장 문화를 융숭시키며 백성을 위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제위 33년을 황희라는 신하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작금에 들어 나라가 혼란스럽다. 아니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다. 대통령은 탄핵되고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정국을 이끌고 있다. 황희의 정치적 경륜과 혜안을 황교안 대행이 끌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조선은 원래 척불숭유 정책을 통치이념으로 하고 출발한 유교 국가였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태조 이래 불교를 믿어왔고 효령대군(세종의 둘째 형)은 불가에 귀의한 몸이기도 했다. 대궐 안에 왕실을 위한 불당을 지으려 하자 유학자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중재한 황희의 탁월한 정치 능력, 지금 이 시대가 바라는 정치 지도자상이기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훗날 박근혜 정부의 황교안은 조선 시대의 황희였다는 등식이 성립됐으면 하는 국민들의 여망을 이 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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