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당권 도전에 실패했던 아픔을 딛고 마침내 ‘제2 야당’에서 당권을 거머쥐는 ‘2전3기’를 이뤄냈다.
호남의 대표적 정치인 중 하나이자 김대중 정부의 실세로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지냈고, 원내대표는 무려 3차례나 역임하면서 ‘원내대표 전문가’란 말까지 들었던 그가 결국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의 막판에 한 정당을 온전히 이끄는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지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여의도에 입성한 박 대표는 특유의 성실함을 무기로 민주당과 국민회의 시절 내리 4년간 촌철살인의 명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박 대표는 대통령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 정책기획수석, 대통령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을 두루 지내며 정권 2인자로서 ‘실세 중의 실세’로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측과 접촉, 6ㆍ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막후 역할도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박 대표는 참여정부 들어 대북송금 특검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날개 없는 추락’을 맛봤다.
박 대표는 2007년 말 복권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공천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오뚝이처럼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당선돼 친정에 복당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듬해인 2010년 원내대표로 선출, ‘DJ 복심’ 이미지를 벗고 ‘정치인 박지원’으로 거듭나며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첫 당권 도전이었던 2012년 1ㆍ15 전당대회 국면에서 통합 반대파로 몰리면서 4위로 최고위원이 되는 데 그쳤고, 같은 해 4월 총선 후 또 한차례 원내대표가 되긴 했지만, ‘이-박(이해찬-박지원) 담합’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