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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연원은 창원 소답동에서
‘소녀상’ 연원은 창원 소답동에서
  • 송종복
  • 승인 2017.01.16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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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원래 ‘소녀상’이란 조각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를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 소녀상’ 등으로 이칭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의 아들 김익태가 1982년 창원시 소답동의 고향집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소녀상(少女像)’과 ‘조모상(祖母像)’을 발견했다. 그는 이 두상을 갖고 서울의 병석에 계신 부친에게 보여줬다. 그 자리에서 ‘조모상’은 도쿄미술대학 재학시절에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소녀상>은 신문에 1936년에 제작된 것으로 소개돼 알려졌다.

 요즘 드라마 ‘귀향’은 지난해 2월 24일에 개봉됐다. 1942년에 천진난만한 열네 살 정민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난다. 정민은 함께 끌려온 수많은 소녀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차디찬 전쟁 한 가운데 버려진 소녀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만 가득한 끔찍하고 고통과 아픔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최근 ‘평화의 소녀상’은 조각가 김운성ㆍ김서경 부부가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의 의뢰로 제작했다. 과거의 김종영의 ‘소녀상’과 오늘 김운성의 ‘소녀상’은 견해가 서로 다르겠지만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 때의 ‘소녀상’이란 이름을 볼 때 피해본 소녀상과 일맥상통한 감이 있어 창원의 소녀상이 그 연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서울, 부산, 세종, 광주 등 국내 33개 지역에 세워졌다. 해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와 미시간 주에, 캐나다의 토론토에 건립했고, 현재는 호주에도 세우고 있다.

 최근에 세우는 ‘소녀상’은 상징성이 많다. 단발머리와 뜯겨진 머리카락이다. 당시 조선 소녀는 댕기를 주로 했는데, 단발머리를 한 것은 조국과 떨어져 있다는 의미다. 꼭 말아 쥔 주먹은 역사를 왜곡하고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또 땅에 딛지 못한 맨발의 발꿈치는 전쟁이 끝났지만 많은 소녀들은 돌아오지 못 하고, 간신히 돌아 와도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는 표현이다. 즉, 한국에 와도 손가락질을 받으며 고국 땅을 편히 밟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 어깨위의 새는 자유와 평화를 상징한다.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와 현존하는 할머니를 이어주는 매개체의 표현이다. 곁에 빈 의자를 둔 것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의 빈자리며, 또한 나란히 앉아 소녀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림자는 현재의 할머니를 표현했고, 가슴에 하얀 나비는 환생을 뜻으로 소녀와 함께 하자는 상징이다.

 최근 부산과 일본의 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를 두고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있었다. 이를 본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지난해 박근혜정부와 합의에 따라 10억 엔을 줬다고 강조하고, 한국정부에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 이에 의해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총영사를 귀국조치 시켰다. 지난 1970년에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에 헌화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는 조국 독일에 빚진 것도 없고,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조국을 대신해 헌화만 해도 충분한데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2차 대전 때 피해 입은 폴란드는 물론 유대인도 독일 총리에 감동했다. 일본의 총리도 한국에 와서 ‘소녀상’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 돈 몇 냥 던지고는 거만하게 굴지 말고, 독일의 총리처럼 사죄한다면 위안부 할머니는 감동의 눈을 감고 고이 가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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