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6:38 (목)
탈주범 지강헌 그리고 이재용
탈주범 지강헌 그리고 이재용
  • 허균 기자
  • 승인 2017.01.19 22: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허균 문화체육부장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비지스의 홀리데이 시작 구절이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기고 29년 전 자해로 죽어간 탈주범 지강헌이 듣고 싶어 했던 곡 말이다.

 88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8년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죄수들이 호송버스에서 탈출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탑승 죄수는 25명. 그중 12명이 서울시내로 사라진다. 이들은 8일 동안 시내를 휘젓고 다니며 서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탈주 이유에 대해 과도한 형량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모두 상습 절도범이었고 당시, 엄격한 법 적용과 누범으로 인한 장기형량범들이었다.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했던 4명의 일당은 3명이 자해로 죽고 1명이 살아남는 어처구니없는 파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논리를 정확히 전달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박근혜 대통령 측에 뇌물을 준 의혹을 받고 있는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19일 기각됐다.

 지난 18일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진행한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진술 조서와 증거 자료 검토 작업을 벌인 끝에 이날 새벽 4시 50분쯤 박영수 특검팀이 청구한 이 부회장 영장을 기각했다.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뤄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과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기각 사유다.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가까운 요구’에 미르ㆍK스포츠재단을 지원했다는 삼성 측의 입장을 법원이 간과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앞으로도 권력이 요구하면 거절하지 않고 부당거래를 해도 된다는 무책임한 논리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를 겨누고 있는 특별검사의 칼날도 결국 금력(金力)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특검의 헛발질은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특검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한 날은 이 부회장 조사를 시작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5일 동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에 대한 특검의 장고(長考)는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이는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이어졌다. 특검의 장고는 또 ‘이 부회장 구속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기사를 쏟아 내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구속영장은 법원이 기각했지만 뇌물죄가 의심되는 이 부회장을 구속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특검의 몫이 됐다.

 법(法) 앞에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기본적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특검 스스로가 걷어차 버렸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많이 나간 것일까? 오랜 세월 이 나라에서 이어져 온 기업과 권력의 불법적인 정경유착을 끊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는데 말이다.

 특검의 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부회장 구속은 가장 난이도가 높을 것이라 예상됐었다. 민간인 국정 농단을 파헤치기 위한 특검의 활동 중 권력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재벌의 구속은 조금 비켜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특검의 구속 영장을 기각한 법원의 제동에 특검 수사가 위축될까 하는 우려다. 필요하다면 더 엄중한 보강수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고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특검은 문제가 불거진 다른 재벌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원의 영장기각이 특검의 칼날을 무디게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특검이 조사하고 있는 민간인 국정농단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30년 되돌려놓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탈주범 지강헌이 듣고 싶어 해, 전 국민이 함께 들었던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던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귓가에 맴도는 오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