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9:30 (금)
관조하는 삶
관조하는 삶
  • 한중기
  • 승인 2017.01.31 2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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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기 두류인성교육연구소장
 얼마 전 선물로 받았던 한관희 시집 ‘눈 오는 날, 태양다방’을 읽으면서 삶을 관조하는 시인의 놀라운 통찰력에 새삼 빠져들었다. 그리움과 상실의 세계를 살아가면서도 삶을 부정하는 대신 그 가운데서 피어오르는 삶의 가치를 찾아내는 시인의 힘을 느끼게 했다. 원숙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고와 시각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내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십수 년 전부터 달리기를 함께하며 교감해온 바이지만 한편의 시어로 엮어지면서 감동의 무게를 한층 더했다. 달리는 자신을 제3의 눈으로 응시할 때 시인은 숲이기도 했고 비가 되기도 했다.

 모처럼 느껴보는 시의 위대함을 그의 시어를 통해 음미할 수 있어 행복한 설 연휴가 됐던 것 같다. 습관처럼 해오던 일을 멈추고 지나간 어제의 나를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다. 질풍같이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잠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했다. 관조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눈이랄까.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그 속에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를 관조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불가에서는 참된 지혜의 힘으로 세상의 이치나 사물을 통찰한다고 봤고,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관조로 풀이하고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눈을 통해 나를 관조하는 삶이 필요한 시점이다.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질없는 것, 지엽적인 문제, 쓸데없는 것, 다른 사람의 눈치나 체면 같은 것들을 도려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나를 끌어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부족함에 머물기를 실천해 볼 일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존재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먼저 깨닫지 못하고, 주위의 평가에 대한 실망과 시기, 질투로부터 오는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론 아픔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비난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면서 ‘완벽의 덫’에 빠졌고, 이는 다시 스스로를 비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경험을 해왔다. 삶의 두께가 더해지면서 문득 톱아본 즉,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나를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나마 행복하다 하고 싶다.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배우인 양 특정 배역에 한 번 빠져들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보면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특정 배역의 페르소나를 쓴 채 영화 속 스토리의 세계를 관조하는 경험은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연극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한껏 조롱하고 모욕하는 연극을 천연덕스럽게 관람하고는 ‘내가 모르는 나의 단점이나 잘못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찾아보러 왔다’고 할 정도로 연극의 인기를 대단했던 모양이다. 당시 최고의 흥행몰이를 했던 연극은 ‘페르시아인들’로 전해진다. 인류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제국을 멸망의 길로 들게 한 크세르크세스 왕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수한 그리스인을 죽였던 크세르크세스가 무대에서 절망적으로 절규하며 울부짖는 장면을 본 그리스 관객들은 원수였던 페르시아제국의 왕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열광했다는 연극이다.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대제국 페르시아를 이겼다는 자만심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관조적 삶을 배웠고, 패자를 끌어안는 포용과 연면의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된 동인으로 작용했으리라 본다.

 따지고 보면 삶이라는 게 우주가 자신에게 부여한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맡겨진 배역이 무엇인지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임무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 그 배역을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자신은 물론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스타가 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완전하지 못한 삶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관조하면서 인내하며 거침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연습을 부단히 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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