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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 산다는 것
스승으로 산다는 것
  • 안명영
  • 승인 2017.02.27 2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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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영 진주 명신고등학교장
 조선은 주자학을 국시로 삼아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지향했다. 현실적으로 왕위는 혈연에 의해서 계승되므로 왕 스스로 성인이 돼야 이상 정치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으로 공부가 강조돼 국왕이 돼도 예외는 아니다. 경연이라 해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가르치고 강론을 제도화했다. 세자는 어떤가.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으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목표로 세자시강원을 두어 세자를 교육 시켰다. 영의정을 사(師)로 하고 좌ㆍ우의정 중 한 명이 부(傅)로 된다. 師와 傅는 우리말로 스승이라는 뜻의 글자이다. 이사(貳師)는 종1품 찬성이 겸직하며 종3품 보덕 이하 정7품 설서까지는 전임으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실력파들이다.

 연산군은 8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조지서는 보덕으로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 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해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둡느냐’ 했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9월 2일)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연산군(융)이 공부에 불성실할 때는 책을 앞에 던지면서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하니 세자 융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어느 날 융은 벽에다 조지서대소인(趙之瑞大小人), 허침대성인(許琛大聖人)이라고 낙서를 했다. 주변에서는 조지서의 장래를 걱정해 보덕을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세자의 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 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자에게 바른 태도 변화가 될 수 있도록 다름없이 성심껏 지도했다.

 조지서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창원 부사를 희망해 지방으로 내려와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했다. 그러다가 벼슬을 버리고 덕천강변 칠송정에서 강정(江亭)생활을 하다가 갑자사화가 일어나 말이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니 50세이다.

 1559년 고봉 기대승은 과거에 갓 급제해 종9품의 말단 벼슬아치였고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벼슬뿐 아니라 학문적 수준에도 큰 차이가 있었지만 7년간의 논쟁이 시작된다. 스물여섯이나 아래인 신출내기 후학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면 어떻겠는지 고봉에게 물어본다.

 “저는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근심했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됐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봤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두 사람의 관계는 퇴계 사후에도 계속된다. 퇴계 묘갈명의 앞부분은 스스로 지었고 뒷부분은 기대승이 완성했다.

 조지서는 장차 왕이 될 세자 교육에 얼마든지 부드럽게 대할 수 있었겠지만, 성군이 돼야 백성이 편해질 수 있다는 비전으로 엄하게 지도한다.

 스승으로 산다는 것은 진정을 담아 지도하고 학문에 겸손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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