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5:11 (화)
토론자 전성시대
토론자 전성시대
  • 김혜란
  • 승인 2017.03.08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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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지난가을부터 종편 TV들은 21세기 한국판 소피스트들을 쏟아내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각종 시사 프로그램과 토론, 혹은 시사형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토론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안의 특성에 따라,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많게는 서너 번까지 채널을 옮겨가면서 출연한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각각의 기호에 맞는 토론자를 따라 채널을 옮겨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바야흐로 토론자의 전성시대가 온 것일까.

 토론을 할 때 참석자를 흔히 패널(panel)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각 토론자는 패널이 아닌 패널리스트(panelist)이다. 초기에는 주로 교수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어서 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있는 시사 평론가들이 나오고, 그들과 함께 전직 언론인과 전직 판사, 변호사 같은 법조인 출신, 그리고 전ㆍ현직 정치인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직종이 겹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의 토론유형은 다양하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은 ‘촌철살인형’이다. 이런저런 사실에 관한 나름대로의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략적으로 대중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반해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공격하는 뼈있는 한마디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른바 ‘사이다형’도 이 유형에 포함된다. 몸값이 비쌀(?) 것 같은 토론자다. 물론, 이들 토론자의 성향이 너무 강하면 자주 볼 수는 없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종편이라도 모니터와 심의를 피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센 발언을 하고 나면 길게는 두어 달, 짧게는 두세 주 볼 수 없다.

 가장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하는 유형은 ‘우왕좌왕형’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각 프로그램에 꼭 한 명씩은 포진한다. 사실과 평론의 관점이 상황에 따라 바뀐다. 이 사안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안을 또 저렇게 말한다. 가끔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리게도 한다. 이런 경우는 생각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생각과 다르게 표현능력에 문제가 있는 토론자로 보인다. 사실과 상관없는 말을 끌고 들어오는 유형도 이 경우에 속한다. 희한하게도 이런 토론자가 항상 있다. 토론자를 다양하게 섭외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일 것이다. 뭐랄까, 대중들은 짜증 나도 제작자 입장에서는 인기 있는 섭외대상일 수 있다.

 분석형과 평론형으로 나눌 수도 있다. ‘분석형’은 사실에 대해서 남들이 못 보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찾아내는 재미를 주지만, 그것을 자신의 잣대만으로 분석하기 쉽다. 표현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공시적 관점에서 확정을 지어놓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 위험한 토론자이기도 한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일 것이다. 말은 객관적이라고 하면서도 순전히 주관적인 자기 관점만 주장하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들의 추종자가 되기도 한다.

 ‘평론형’은 분석형보다는 스펙트럼이 넓다. 사실을 분석한 후, 비슷한 사안이나 다른 경우를 비교분석해서 총체적으로 보려는 토론자다. 통찰력의 크기에 따라 감동도 주는데, 확정편향에서 벗어나서 중도의 관점으로 사안을 접근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토론자 유형인데 가끔 사실을 놓쳐 버리면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어서 분석형을 거친 노련한(?) 토론자일 때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런 토론자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하고 이들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기도 한다. 한 사회의 진정한 지식인 유형에 해당하고 더 많아져야 하지만 아직은 수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감초형’도 있다. 시사프로그램의 ‘개그맨’ 같은 토론자인데, 사실에 대한 접근 태도와는 상관없이 심각한 토론 중에도 느닷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사람들이다. 항상 유머감각을 겸비한 토론자들이 나온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지만, 대개 유머감각을 발휘하기 힘든 사안일 경우가 많아서 엉뚱하더라도 출연자나 대중들이 싱거운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게 한다면 출연섭외대상이 될 것이다.

 매체 프로그램의 한계도 놓칠 수 없다.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 혹은 다양한 생각접근을 위해 별의별 유형이 나와서 이야기를 주고받게 한다. 판단은 보는 사람들이 내려야 할 몫이겠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토론자가 더 많이 나와 주기를 기대한다. 한발 양보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접근을 하며, 때로는 재미 위주의 토론자가 나와도 괜찮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사안에 대한 판단을 고의로 왜곡하거나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분석하고 평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믿고 듣고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믿을 ‘신(信)’자를 보자. 사람과 사람은 결국 말을 통해 믿음을 만들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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