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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마을에 공병학교가 있었다
분성마을에 공병학교가 있었다
  • 김경희
  • 승인 2017.03.13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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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희 수필가
 내가 사는 분성마을은 오래전 육군 공병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1948년 3월 1일에 창설돼 47년간 50여만 명의 공병인들 양성하다가 1995년 전라도 장성으로 이전했다.

 육군 공병학교는 축성(築城), 가교(架橋), 폭파(爆破), 측량(測量), 건설(建設) 등 기술적 임무를 맡은 병과이며, 초급 공병 장교와 병사를 교육하는 곳이다. 철모를 쓴 병사들의 행군 소리가 구지봉의 아침을 깨우고, 가까운 초소에서 총을 든 병사의 삼엄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경직됐다. 작전훈련과 각종 폭파물 훈련이 시작되면 팽팽한 긴장감이 방금 전쟁이라도 터질 듯 초조했다.

 반세기에 걸쳐 육군 공병인들과 함께한 삼계 일대는 더 이상 한가한 농촌이 아니었다. 해마다 홍수로 인해 제방공사 작업도 그들의 몫이 돼 삽질을 하고 모래자루를 날랐다. 농번기가 되면 논에는 주민들보다 병사들이 더 많이 붐벼 주변 논 주인의 농사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인심 좋은 안주인이 이고 온 새참과 군부대에서 준비해 온 건빵을 나눠 먹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둑길을 걸어가는 여고생에게 건빵과 함께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 주소로 편지를 주고받던 어느 여학생의 데이트 소문이 학교까지 알려져 결국 정학을 당했다.

 김해는 60년대 후반부터 청춘남녀가 넘실대는 격정의 도시로 변해갔다. 육군 공병학교를 이어 김해 경제를 주도했던 한일합섬 공단이 생기면서, 기숙사가 부족해 변두리까지 자취방을 구하는 여공들이 늘어났다. 주민들은 작은 공간도 방을 만들어 셋방을 놓고, 구멍가게를 차려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반면 젊은이들의 연애담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밤이 되면 골목마다 뭇 연인들의 헤픈 웃음소리가 고요한 담장을 넘어 어른들의 밤잠을 깨웠지만, 사글세를 받는 처지라 냉가슴만 앓았다고 했다.

 장성으로 이전한 후, 분성마을은 8년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지난 2003년 가야대학교가 설립되면서 혈기 넘치는 육군 공병 장교들의 혈맥이 이어져, 학구에 불타는 젊음의 도시로 다시 변하면서 대단지 아파트촌이 조성되고, 근린시설과 상가가 밀집해 신도시로 탈바꿈됐다.

 숲이 울창하고 공기가 청정해 기온 차이가 2도 정도 낮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보기 드문 눈이 내리면 겨울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산이 가까워서 등산하기에도 적합한 마을이다. 산을 오를 때는 가야대학교를 낀 등산로를 택한다. 그 길은 금방이라도 총성이 터질 것 같은 낡은 초소가 있다. 그 초소를 지날 때마다 옛날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국가안보와 국위선양에 일등공신이 되어 머물다간 육군 공병학교 자리에 근린공원이 조성되고, 공원 부근에 공병 탑과 역사를 소개하는 부조가 설치돼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킨 육군 공병 학교가 우리 지역에 주둔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젊은 병사들의 용맹성과 투철한 애국심을 확장시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고도의 김해에 또 다른 역사의 장으로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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