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5:21 (수)
적을 이길 수 없는 군주
적을 이길 수 없는 군주
  • 권우상
  • 승인 2017.04.30 2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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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상 명리학자ㆍ역사소설가
 위나라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해 위험에 빠뜨린 적이 있어서 한국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훗날 사마사와 싸우다가 맥없이 패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관구검을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으로 알고 있지만 중국 역사를 보면 그는 성공하지 못한 관원에 불과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주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통치, 즉 지배층의 권력 쟁탈, 관료들의 부패, 백성들 간에 갈등, 분열 등은 반드시 멸망한다.

 현대에서는 월남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고대에서도 이런 사례는 적지 않다. 한(漢)나라가 위(魏), 촉(蜀), 오(吳)로 쪼개져 위주 조조와 촉주 유비가 싸울 때 유비는 언제나 백성을 어루만지면서 국론을 하나로 통합했다. 점령지에 입성해서도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장수나 병사는 가차 없이 목을 쳤다. 심지어는 유비는 항복하지 않는 적군의 장수도 달래면서 항복을 받아내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다. 관구검도 지방의 태수를 지내면서 뇌물을 좋아해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국 도주하다가 부하의 손에 허망하게 죽고 말았으니 정치인에서는 실패한 인물이다.

 반면 사마사는 백성의 마음을 거두는 능수였다. 고평릉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사마의와 함께 모든 행동을 계획했는데 사마소는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사 전날 사마의가 아들들을 살펴보니 사마소는 잠자리에서 뒤척이는데 사마사는 평소나 다름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사마의는 감탄했다. “이 아이가 쓸만하구나.” 이때 사마사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평소에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3천명이나 은밀히 모아뒀던 것이다. 거사 당일 3천명 용사들이 불시에 모여들자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아버지 사마의 조차도 몰랐다. 사마사가 낙양 부근에서 농사를 짓는 군사들 속에서 미리 무리를 모아 놓았던 것이다. 그런 개인 군사가 없었더라면 고평릉 반란은 성공할 수 없었다.

 권력을 잡은 다음에도 그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데 신경을 써서 주위에서 그를 따르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평소에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관원들에게는 엄격하고 매우 독한 사람이지만 백성들은 편안하게 생활을 했다. 위나라 때 여러 번 사마씨 집단을 몰아낼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불발에 그치거나 쉽게 실패하고 만 것은 백성들이 반대파를 따라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조는 공로가 중국을 뒤덮는 위엄이 세상에 떨쳤으나 속임수에 능통하고 권모술수에 의지해 정벌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조조를 두려워할 뿐 그를 신뢰하지 않아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아들 조비, 조예는 조조의 뒤를 이어 가혹한 정치를 하면서 안으로는 호화 궁궐을 짓고 밖으로는 동서로 뛰어다니며 전쟁을 하느라 백성들이 한 해도 편안히 살 수 없었던 와중에도 관료들의 부패로 백성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 사마의 부자는 권력을 잡은 뒤 가혹한 제도를 없애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어려움을 풀어줘서 크게 민심을 얻었기 때문에 회남(淮南)에서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으나 속으로 근심하지 않아도 됐고, 위주 조모가 죽었지만 사방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촉나라는 유비와 제갈량이 사망한 뒤 유비의 아들 유선은 환관의 농간에 빠져 충신의 간언에 빠져 호화생활에다 올바른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백성들이 등을 돌리자 위나라의 장수 등애에게 잡혀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 오나라 황제 손화 역시 백성들을 무척 괴롭혔다. 사치가 심해 그가 쓰는 호화 물건들을 공급하느라 양주의 백성들이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와야 하는가 하면 나라에서는 지출할 돈이 없어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집을 잃고 들판을 헤매이고 있는데도 손화는 후궁의 궁녀를 1천명이나 둬 이들이 쓰는 재물을 조달하느라 백성들이 무척 고달팠다. 결국 오나라도 위나라에 망하자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해 진(晉)나라를 건국했다. 나라가 멸망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군주의 사치와 사리사욕, 파벌 간 권력쟁탈, 적개심이 없어 적의 기만술에 당함, 관료들의 부패로 민심 이반, 자국 내 첩자들의 동향에 무관심하다는 이유 등이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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