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22:34 (화)
한글로 한을 풀어내다
한글로 한을 풀어내다
  • 김은아
  • 승인 2017.05.15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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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아 김해여성복지회관 평생교육원장
 ‘사시 사설 잠만 자는 당신, 그립고 그리운 님….’ 할머니가 적어 내신 한 장의 일기장에 뭉클함이 밀려온다. 마흔 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30년, 홀로 자식을 키워내신 할머니는 혼자 효도 받는 것이 못내 미안타 한다. 어버이날이 있는 5월 이맘때면 유달리 남편이 더 생각나고 그립다 한다.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써 보라 하면 ‘받침도 맞지 않는 글을 누가 볼까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치시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써 오신 글들을 읽어주지 않으면 섭섭해하신다. “내가 살아온 얘기를 적을라카모 소설책 3권은 될끼라.” 그 흔한 넋두리에서 할머니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책을 엮어볼까 마음을 먹었다. 첫 한 문장을 쓰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며 ‘말로 하면 잘 되는데 글로 쓸라고 하면 왜 앞이 캄캄하냐’ 신다.

 할머니들에게 가난과 시집살이는 가슴에 맺힌 제일 큰 응어리다. “할머니 시집살이 어땠어요?” 툭 던진 한마디에 할머니들은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힘들었던 동서 시집살이, 결혼 후 군대 간 남편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던 이야기, 한량이던 남편 때문에 손가락이 갈쿠리가 돼 자갈밭을 일궜던 이야기, 다복다복 어린 자식들 남겨 놓고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교실은 눈물로 강을 이뤘다. 자식에게 공감받지 못했던 이야기,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고행 같았던 그 삶을 함께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면서 어릴 적 얘기에는 세월의 무게와 흔적을 버리고 마치 그 시절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추억을 담아낸다. 이렇게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은 할머니들의 역사를 찾는 첫 단추가 된다. 갖가지의 살아온 사연들이 모여 이야기 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에 적어오는 글에서 할머니들은 조금씩 한을 풀어내고 있다.

 TV에서 흔히 들었던 사연들이지만 그분들이 직접 적어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받침 글자가 어려워 힘들다 하시면서도 하루하루가 즐겁다 하신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에 서서히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한 할머니는 글을 쓰게 되면서 남편과 사별하고 겪게 된 공황장애를 이겨내고 사별의 아픔을 차츰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하셨다. 또 다른 분은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잊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행복을 느끼게 됐다며 자신이 살아온 생이 정말로 값진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들은 한국전쟁, 보릿고개, 독재정권 등의 수많은 역사적 난관 속에서 딸로 이 땅에 태어나,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낸 여성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암울했어도 자신만이 만들어간 삶의 모습들이 있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남기는 인생 선배들의 일기장과 같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할머니들의 삶, 그 자체가 예술이고 역사라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들의 현재가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삶을 세상과 잇고, 젊은 세대와 잇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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