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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만평
커피 만평
  • 경남매일
  • 승인 2017.05.16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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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흐린 봄날 오후다. 커피 한 잔이 몹시 당기는 분위기다. 계절과 시간, 날씨 그리고 기분과 가장 밀접한 것으로 커피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나는 식도락가는 아니다. 군것질을 좋아하지도 않고 딱히 즐겨 먹는 음식도 없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주저 없이 선택하고 물려 하지 않는 기호식품은 단연 커피다. 다른 욕심은 없어도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남다른 욕심이 있다. 하루 서너 잔은 기본으로 마신다. 어떨 땐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원두에 욕심이 많아 누군가 커피 한 봉지 선물을 하면 가장 환호성을 지르며 밥 한 끼보다 더 배불러 한다. 딸들도 어느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향이나 맛이 좋은 커피를 발견하면 꼭 사다 준다. 엄마 취향에 대한 존중이며 사랑이다.

 나름으로 다양한 커피를 마셔봤다고 자부한다. 우리나라 제품 맥심 원두커피부터 베트남,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 잔에 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루왁 커피까지 두루 섭렵했다. 흔히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 내장기능까지도 최적화된 모양이다. 쌉싸름하고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릴 때의 개운함과 고소함은 거의 전율이 일 정도다. 특히 비 오는 날은 커피 향까지 기가 막히지 않은가.

 고종황제가 커피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얘기다. 그때부터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커멓고 쓴 맛 나는 커피가 뭐 그리 맛이 있을까 싶지만 그 맛에 길들여지면 중독되는 마약 같은 음료다. 예술가들에게 커피는 작품 탄생의 일등 공신이었다. 베토벤은 커피 한 잔에 60개의 음률이 떠오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좋은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수줍게 건네는 ‘커피 한잔하실까요’는 세상 어느 문장보다 가슴 떨리고 설레게 하는 말일 것이다. 예전 백구두를 신은 한량들이 드나들던 읍내 다방의 프림 설탕 가득 넣은 속칭 다방 커피. 그 커피보다 더 기다렸을 다방레지에 대한 연정은 어르신들에겐 가슴 아릿한 추억의 한 이랑에 숨어있는 달콤함일 것이다.

 한때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다는 황금비율의 믹스커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입에 착 달라붙던 달달한 맛은 중독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림이나 설탕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보고에 요즘 원두커피가 건강론 측면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원두커피가 인체에 이로운 효능은 물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날리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니 가뜩이나 건강에 신경 쓰는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젊은 시절 4년간 다도(茶道)를 했다. 시간과 향과 도(道)에 입각한 차 공부는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개인적인 정서에도 그렇고 인체에 미치는 면에서도 커피보다 우위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또한 그 오묘하고 고상한 맛에 매료됐었다. 특히 몸에 이로운 카페인을 함유한 녹차는 커피보다는 유익한 음료로 인식됐었다. 하지만 나날이 부흥하리라 믿었던 우리 전통차 문화는 어느 날부터 슬그머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나 또한 욕심껏 사들였던 다구를 먼지만 입힌 채 천덕꾸러기처럼 구석에 밀쳐놓고 지금은 누구보다 커피를 사랑하고 있다.

 거리엔 한 집 걸러 다양한 이름을 단 이국적인 인테리어의 커피집이 들어차 있다. 일부러 찾아야 하는 전통찻집을 제치고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커피의 종류도 다양하고 값도 만만치 않지만 어느 커피숍이나 연일 만원사례다. 가히 커피 공화국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팔순이 넘으신 친정아버지께서도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신다. 음식을 다 드신 후 커피까지 한잔하시고 나면 흡족한 얼굴로 “아이고 잘 먹었다”를 반복하신다. 믹스커피에 따로 설탕 한 스푼을 더하시니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자식들은 원두커피를 권유하지만 오래 길들여진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남녀노소 막론한 현대인들에게 뗄 수 없는 커피 한 잔. 그 강렬한 색깔과 맛에 오늘도 깊이 빠져 있다.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을 맴돈다. 한 잔 마셔야겠다. 오늘 내가 마실 커피는 이름도 오묘한 케냐 A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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