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0:07 (목)
디지로그 시대의 삶
디지로그 시대의 삶
  • 정영애
  • 승인 2017.06.04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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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애 금성주강(주) 대표이사
 이 지구상에서 ‘먹는다’는 말을 우리 민족처럼 다양하게 쓰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기본이고, 시간을 잡아먹는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 돈을 떼먹는다, 욕을 먹는다, 챔피언을 먹었다, 축구에서 한 골 먹었다, 한 방 먹었다, 꿈을 먹고 산다 등 무척 다원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먹는 것에 한이 맺혀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먹는다는 말이 언어생활 속에서 습관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날의 떡국 맛 같이 씹는 미각은 아날로그적 감각이 아닌 디지털적 기술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감성은 1과 0의 조합으로 디지털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의 합성어인 디지로그(Digilog)는 이어령 박사가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라는 저서 발간 후 널리 사용하게 됐다. 얼마 전 중국의 거부인 알리바바 마윈 회장은 중국 기업가 클럽이 주최한 국제콘퍼런스에서 우리 인류는 앞으로 30년간 인터넷 때문에 고통받는 삶을 살지 모른다고 했다. 거지도 QR코드로 적선을 받는 세상의 미래는 인터넷 잘 쓰는 회사의 것이고, AI-로봇의 도입으로 일자리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기계는 사람이 못하는 위험한 일만 해야 인간과 공존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혁신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단적으로 적시하는 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편리성과 혁신, 발전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와 함께 통제, 적응 불능, 혼란, 감시, 불평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같이 떠올리게 한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면서 또 다른 저서 ‘적응성의 위기’에서 디지털 시대의 명과 암을 동시에 적시했다. 우리 인간은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유토피아를 꿈꿔 왔지만 앨빈 토플러나 마윈이 예견한 것처럼 인류의 미래는 기회와 재앙이 동시에 공존하는 디스토피아가 될지도 모른다.

 최근 랜섬웨어(RANSOM WARE)로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랜섬웨어는 몸값을 요구하는 랜섬(RANSOM)과 제품을 뜻하는 웨어(WARE)의 합성어이다. 사용자의 동의 없이 컴퓨터에 불법으로 침입해 사용자의 파일을 인질 삼아 금전을 요구하는 악성 프로그램이다. 이번 랜섬웨어 사태로 영국 등 유럽 수십 개국에서 피해를 입었고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도 이 악성코드가 발견됐다. 디지털 시대의 어두운 면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앞으로 랜섬웨어의 파생 악성코드가 갈수록 기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돼 예방대책이 시급하다. 어쩌면 인류의 삶이 컴퓨터라는 정보기기의 발명으로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이 악성 코드는 범인의 색출이나 검거도 쉽지 않아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는 항상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컴퓨터 덕분에 생활의 편리성, 신속성, 정보이용의 평등성, 민주적 의사소통의 활성화로 인간의 삶이 크게 향상됐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도 더욱 커지고 있다.

 한편, 디지털 문명에 대한 기우의 반작용으로 수년 전부터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복고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디지털적인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 감성을 즐기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CD나 칩으로 대체 됐던 음원이 LP와 카세트테이프의 재등장으로 많은 마니아 층을 형성한 결과 생산이 중단됐던 제품생산시설이 재가동 되고 있다. 최근 카세트테이프로 신곡을 발표하는 가수들이 생겨나고 고물로 밀려났던 워크맨과 덱의 중고가 시세가 2~3배나 폭등했다고 한다. 또한 랜섬웨어로 놀란 사람들이 컴퓨터에 보관한 자료의 유실을 우려한 나머지 컴퓨터나 스마트 폰에 저장해 온라인으로 공유했던 사진을 인화해 보관하려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각종 유용한 자료축적도 옛날 방식처럼 책이나 신문스크랩, 컴퓨터 자료 출력으로 보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사라질 것 같았던 흑백필름이 되살아나자 생산 공장이 생기고, 중고 필름카메라의 거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는 모두 느림의 미학을 즐기려는 감성파 신 아날로그 족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그들은 IT 사용을 거부하고 탈 디지털, 탈 온라인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사이버 공격이 일상화되면서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사생활 노출과 추억어린 사진이나 중요한 자료의 유실위험에서 벗어나려는 행동들이다. 그들은 아예 디지털과는 담을 쌓고 아날로그적으로 생활습관을 바꾸려는 것이다.

 우리가 꿈꿔 온 유토피아가 컴퓨터의 발명으로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인간적인 감성이 매몰돼 가는 세상을 보면서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을 살고 싶은 본성이 발동됐는지 모른다. 디지로그 적인 삶은 디지털적 생활방식과 아날로그적 감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인간적인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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