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발휘해 물적ㆍ정신적 도구를 창안해 삶에 유용하게 씀으로써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성(理性)의 소지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존엄성을 지닌다. 그러면 이성은 인간성내(人間性內)에 있어서 신적요소(神的要素)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인식적 존재일 수 있게 해 주며, 스스로의 자주적 판단에 따라 선악 시비 등을 구별해 행동할 수 있는 도덕적 주체가 되게 하며 옳다고 생각되면 어떤 유혹과 권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어엿한 용기와 자존심을 발휘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만드는 근거라 하겠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도덕적 주체다.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 주체란 뜻이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가 전제돼 있지 않는다면 동물과 같이 본능에 의하거나 타자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각적 인간은 결코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내심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양심(理性)의 소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가 된다. 우리 모두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됨을 긍지로 여겨 자신에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한번 쯤 살펴볼 일이다.
누워서 담배를 가져오너라 재떨이를 가져오너라 하던 남자가 미국에 가족 단위로 이민을 갔다. 남편은 낮에 직장에 나가고 부인은 밤에 일을 한다. 부인이 나가는 서민층 야간업소에는 남자 손님들이 많아 부인이 무거운 물건을 들면 남자 손님이 얼른 일어나 도와준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새로운 의식에서 깨어난 것이다. 누워서 이것저것 시키는 남편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고, 애정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부부는 결국 이혼하게 됐다.
부인이 고기를 굽는다.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고기를 부지런히 먹는다. “멋없는 남자! 쌈 좀 싸서 입에 하나 넣어 주면 어디가 덧나나!” 고기만 굽는 부인은 갑자기 외로워진다. 마치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려고 온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은 트림을 하며 소파에 가서 등을 기대어 TV를 켜고 커피를 타오라고 시킨다. 이때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나에게 커피를 타 다 주는 그런 남자는 없을까?” 외로운 아내가 퇴근 때 전화를 건다. “여보 우리 오늘은 호프 한잔해요” 그런데 남편은 무뚝뚝하게 말한다. “피곤해, 그냥 집에서 밥 먹자” 정서가 없고 낭만을 모르는 이런 남편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코 한마디 던진 말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준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다운 냄새는 이렇게 작은 곳에서 묻어난다. 그리고 문명은 작고 섬세한 데에서 피어난다. 섬세하지 않은 문명은 없다. 문명화(Civilization)란 곧 여성화(Feminization)를 의미한다. 야만 시대 여자들은 건장하고 힘이 센 남자를 선망했다. 하지만 문명시대 여자들은 자상하고 날렵하게 잘 챙겨주는 남자를 선망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성실하고 지식과 자상한 사람이 역사를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