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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稷壇(사직단)
社稷壇(사직단)
  • 송종복
  • 승인 2017.06.21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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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社:사-토지의 신 稷:직-곡식의 신 壇:단-뜰

 ‘연속가뭄’이 오면 왕은 사직단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다. 社는 국가신, 稷은 토지신으로 믿고, 모시기 위해 사직단을 세웠다. 일제는 1908년 사직단을 훼손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경복궁은 인간이 사는 집이고, 사직단은 귀신이 사는 집이다. 즉, 인간의 집을 사(社)라 하고, 귀신의 집을 직(稷)이라 했다. 종묘는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곳이고,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장소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연속가뭄’이 오니 왕이 직접 사직단에서 비를 내려 달라고 빌기도 했다. 이후 큰 가뭄이 오면 역대 왕은 사직단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삼국사기>와 <문헌비고>에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391)에, 신라는 선덕왕 4년(783)에, 고려는 성종 10년(991)에, 조선은 태조 2년(1393)에 사직단을 세웠다.

 현존하는 전국의 사직단은 7개이다. 사직단대문(보물 제177호), 서울사직단(사적 121호), 충북보은최인사직단(기념물 157호), 전북남원사직단(기념물 79호), 대구노변동사직단(기념물 16호), 경남산청단성사직단(기념물 255호), 경남창녕사직단(기념물 278호)이다. 중국은 명(明)나라 때 베이징[北京]의 천안문 서쪽 중산공원에 세워져 있다. 조선은 조상에 제사하는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을 신성시해 종사(宗社)라고 했다. 또한 이를 국가로 상징하기도 했다. 이곳에 제사를 관장하는 관청은 사직서(社稷署)다.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지방의 주현(州縣)마다 설치했다. 크기는〈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는 25척, 높이는 3척이다.

 사직단의 설치는 주로 도성의 서쪽에 위치하며 정월에는 ‘기곡제’를, 가뭄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비가 많이 오면 ‘기정제’를,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를 지냈다. 제주로는, 수도에는 국왕이, 지방에는 수령이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를 혈제(血祭)라 해 제수에 돼지나 양의 머리를 날것으로 봉헌한다.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사직단의 지위를 태사ㆍ태직으로 승격시켜 불렸다. 1908년 일제 칙령에 의해 폐지되고 일부는 학교부지로 사용됐다.

 일제는 1911년 서울의 사직단을 헐고 총독부의 관할에 넘겼고, 1922년에는 도로를 내고, 1924년에는 공원으로 조성했다. 또한 일제는 1909년에 창경궁에 동물원을 짓고는 1911년에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1970년대 종묘사직 일대를 도서관, 수영장, 동사무소, 파출소 등을 건립했다. 늦게야 宮에다 苑을 만든 것은 창피함을 알고, 1984년 5월에 동물을 과천으로 옮기고, 창경원을 창경궁이라 했다. 그러면 원남동, 원서동도 궁남동 궁서동으로 개명함이 어떨까. 또한 최근 ‘연속가뭄’에 국가 원수가 사직단에 기우제를 지냄이 마땅할 터인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어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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