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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국가유공자 인정 기쁨보다 씁쓸함이…
뒤늦은 국가유공자 인정 기쁨보다 씁쓸함이…
  • 박성렬 기자
  • 승인 2017.07.09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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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이동면 송효익 씨 1980년 대간첩작전 예비군으로 투입 총상 37년 지나 최근 통보
▲ 국가유공자 요건 해당 결정 안내문을 송효익 씨가 내려다 보고 있다. 송씨는 “이 몇 장 안 되는 서류 하나를 받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떠올리면 서글프기만 하다”고 말했다.
 산야의 푸름이 짙기에 누군가는 더 슬프다 했던 ‘6월’, 그 ‘6월’이 지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는 7월에 전훈의 상처가 깊게 베인 잊혀져 가는 한 사람의 무명용사가 문득 생각나 이 글을 쓰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자는 남해군재향군인회의 도움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몇 차례 지면에 담아냈다.

 올해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로 ‘6월’을 보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남해군 이동면 난음마을에 사는 송효익(60) 씨다. 송씨는 1980년 12월의 그 날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잊히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아마 독자 중에 1980년 12월 이곳 남해군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기자도 그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980년 12월 1일 밤 11시 30분경 남해군 삼동면(현 미조면) 미조리 해안에서 수중추진기를 이용해 해안에 침투한 무장간첩과 이들이 타고 온 간첩선이 발견돼 육ㆍ해군과의 교전 끝에 무장간첩 2명을 사살하고 도주한 1명은 추격 중이며 어선으로 위장해 퇴각하던 괴선박 1척도 이튿날인 2일 오전 6시 59분경 미조리 남방 80㎞ 해상에서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추가로 입수한 자료와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남해 대간첩작전의 경위는 사살된 무장공비 외 일부 잔당이 금산 자락을 타고 도주했고 최초 교전이 있었던 나흘 뒤 상주 천하저수지 인근 바위 틈에 은신 중이던 잔당을 탐색 격멸했다는 내용과 이 작전 수행 도중 아군 3명의 장병이 전사했다는 것.

 너무나 간결한 신문기사 몇 개만 쥐고 송씨의 기억을 따라 37년 전 그 해 겨울로 갔다. 송씨는 그 해 여름 군 복무를 마치고 잠시 집에서 쉬던 중이라고 했다. ‘동장군이 물러나면 부산으로 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마’ 했던 중이라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그는 무장공비가 침투한 날, 예비군 신분으로 대간첩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해안으로 침투해 금산 자락을 타고 도주한 무장공비 잔당의 도주로를 차단 하는게 그의 첫 임무였던 모양이다. 며칠을 금산 자락을 오가며 매복하던 그는 작전 마지막 날 삼동면 내산 굴바위 골에서 있었던 마지막 수색작전에 투입됐다.

 도주한 무장공비를 잡기 위해 뒤를 쫓고 반대 방향에서도 포위망을 좁혀가던 상황이었다고 송씨는 그날의 상황을 기억했다.

▲ 송씨의 우측 대퇴부에서 들어온 총알은 그의 등 뒤로 빠져나가며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그날 오전 11시 30분쯤 송씨는 무장공비와의 교전 중 총성에 놀란 예비군의 오발탄에 오른쪽 다리를 맞았다. 송씨의 오른쪽 다리 대퇴부로 들어간 탄환은 그의 오른쪽 허리 윗 춤을 뚫고 나왔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몸에 남은 반흔은 뚜렷했다.

 동료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온 그는 곧장 부산 망미동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송씨의 부상 후 무장공비는 사살됐고 작전은 끝났다. 겨울에 병원에 후송됐던 송씨는 이듬해 보리가 파랗게 익어갈 즈음 다시 고향 남해로 돌아왔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후유증은 길었다.

 수십 년간 그가 겪은 아픔은 아내인 김미순(58) 씨가 대신 전했다.

 남편 효익 씨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곁에서 살림을 살피던 아내 김씨는 “애 아빠가 그 이후로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잔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짧은 한 마디었지만 그간 송씨와 그의 가족이 겪었을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떤 날은 상처의 통증에 잠을 깼고 그보다 더 무수한 날은 그 날의 기억이 그의 잠을 깨웠다.

 찰나에 일어난 사고로 송씨의 삶은 바뀌었지만 거의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그는 마치 숙명처럼 그 날 그 일을 받아들이고 살았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날의 일을 상기한 때는 지난 2008년, 효익 씨의 아들 근호 씨가 예비군훈련을 받고 온 날 부터이다.

 어릴 적 아버지를 통해 당시 이야기를 들었던 근호 씨는 안보교육 중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다. 거의 상당수는 아버지에게 들은 대로 였지만 이름까지 정확히 얘기하던 전사자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예비군 부상자는 이름조차 없었다.

 교관은 “작전에 투입됐다 부상을 당한 예비군은 치료는 물론 충분한 보상과 더불어 국가의 예우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근호 씨는 ‘아버지 말고 다른 부상자가 있나보다’라고 여겼단다. 쭉 설명을 듣다보니 교관이 얘기하는 예비군은 아버지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 길로 근호 씨는 남해대대와 예비군중대를 오가며 그 ‘예비군’의 신원을 찾아나갔다.

 아들 근호 씨가 찾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료는 없었다. 이후 더욱 놀란 것은 아버지가 후송됐던 부산 국군통합병원에도 아버지 효익 씨의 의무기록이나 당시 상황을 기록해 둔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국방부에도 질의를 했지만 ‘자료 부존재’로 모두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수년 동안 여러 기관을 오가며 아버지 이름 석 자라도 찾을 방법을 찾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수고가 모두 허사로 돌아간 것도 허탈한데 그 과정에서 효익 씨와 아들 근호 씨는 “뒤늦게 보상이나 받으려 한다”는 힐난을, 다른 곳에서는 “아무 자료도 없이 무슨 국가유공자 인정이냐. 아는 사람 중에 국회의원이나 좀 높은 사람 있으면 거기다 줄을 대라”는 등 조롱에 가까운 말도 들었다.

 비록 전쟁은 아니었을지라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섰다 입은 부상이었고 이로 인해 인생이 바뀐 사람에게 그리고 아픔을 나눠진 가족에게 국가와 공무원들은 그렇게 각박하게 대했다.

 그렇게 10년이 다 돼 갈 즈음 송씨와 아들 근호 씨는 최근 경남 서부보훈지청으로부터 국가유공자 요건에 해당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기쁨보다 서글픔이 앞섰다.

 “송효익 이름 석 자 찾았어요. 남해 대간첩작전 전사자 세 명의 이름 뒤에 무명(無名)의 ‘예비군 부상자’로 남았던 곳에서 이제 ‘송효익’, 이름 석 자 찾은 거예요.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았는데 이름 석 자 찾는 일이 그리 오래도 걸렸 다는게…. 그게 서글퍼요.”

 그가 이 나라로부터 “송효익 씨,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그 말을 듣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몸의 상처는 어쩔 수 없더라도 그가 겪은 마음의 상처만은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기를 바라며 내년 ‘6월’은 조금은 덜 아픈 송씨의 ‘6월’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아픔이 하루빨리 치유돼 활짝 웃는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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