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0:05 (금)
무엇을 갈고 닦을 것인가
무엇을 갈고 닦을 것인가
  • 정창훈
  • 승인 2017.07.19 2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창훈 객원위원
 거제 몽돌해수욕장 모터보터 굉음이 파도 소리를 압도했다. 바닷물이 몽돌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빠져나가면서 들려주는 푸른 음악은 전신을 시원하게 한다. 바닷가의 수많은 돌과 조개껍데기들은 어떻게 조탁 됐다는 말인가. 위대한 자연만이 해낼 수 있는 거룩한 작품들은 수십억 번의 만남과 헤어짐, 어둠과 밝음, 추위와 뜨거움, 비바람과 태풍,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다듬어진 기다림의 증표가 됐다.

 그중에 하나를 골라 잔잔한 수면위로 나를 대신해 수제비를 날렸다. 바다는 저수지나 못처럼 제한된 곳이 아니라 어떤 크기의 돌멩이든 받아 주겠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의 동작은 느리고 폼은 어색했다.

 세월은 우리의 실체를 작게 또 작게 만들고 어느 순간에는 존재마저도 사라지게 하는 신비로움과 마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는 더 멀리 더 멋지게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물수제비는 물 위를 통통 튀어나가면서 가까운 순서대로 커다란 원이 점점 희미해진다. 잠시 후 조금 작은 원이 퍼지면서 사라지고 더 작고 희미한 원은 퍼지는 듯 없어진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기쁨, 슬픔, 그리움, 아름다움도 큰 원으로 다가왔다가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다 풀어져 흔들리던 지름마저 잔잔한 강으로 바다로 흐르고 수면 속으로 사라지고 하늘나라로 날아간다. 물수제비 소리는 물의 영혼이 한 방울 한 방울씩 제 몸을 수제비처럼 떼어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물 위에 머리를 박는 소리다. 모든 물소리는 비명의 소리요. 탄식의 소리요. 고뇌의 탄성이다. 물소리도 그냥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물끼리 부딪치고 커다란 바위와 돌에 엉키고 밟히면서 내는 소리다. 가장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인고의 힘이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울음이고 웃음이다. 아무런 장애나 방해도 없이 직진하는 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 홀로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마음껏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다. 자연과의 교감에서 나름의 소중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나 스스로 많이 변했지만 어린 시절 성격은 한 마디로 내성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누가 말을 걸면 마지못해 답을 하는 수동적인 스타일이었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아서 혼자 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언제부터인가 그 생활도 불편하지 않았고 일상이 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에 습관처럼 도전도 하고 단련해 고독의 에너지를 지혜와 힘으로 키워뒀다가 필요할 때 가끔 끌어내 보는 연습도 했다. 독서에 몰입하면서 책 속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저자들이 다시 태어나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상대로 흡족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의 `어른의 우정`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한 노부부가 있었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편은 누가 봐도 기력이 쇠하고 침울해져 자식들이 아무리 함께 살자고 해도 고집을 부렸다. 이대로 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다들 걱정했지만 그는 `돌 닦기`를 시작하며 생기를 되찾았다.

 적당한 돌을 그저 닦다 보면 뜻하지 않은 멋진 장식품이 생긴다. 그는 그것을 자식들과 손주에게 보이고 혼자 뿌듯해했는데 그때 그의 눈은 빛나고 말도 또렷했다. 그는 돌이라는 친구를 발견함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조탁(彫琢)은 보석과 같이 단단한 것에 무엇인가를 새기거나 쪼는 것이나, 문장이나 글 따위를 매끄럽게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신을 조탁한다`고 하면 자신의 영혼에 무엇인가를 새기거나 다듬는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인가를 갈고 닦거나 새기는 행위가 자기 내면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수선해질 때 주위를 깨끗이 정리하고 먼지 묻은 책장이나 전자제품을 오랜 시간 닦기도 한다. 뭔가를 닦으라고 하면 꽤 오랜 시간을 계속해서 닦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 조각, 보석세공, 목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이해할 수수 있을 것이다.

 가정용품의 제작ㆍ수리ㆍ장식을 직접 하거나 나무 목재를 준비하는 시간, 서예를 위해 먹을 가는 시간이 있다. 이때 눈과 손은 물건에 집중돼 있지만 자기 내면과의 대화도 함께하게 된다. 미세한 동작의 감각이 뇌에 전달되면서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잘할 수 있어`,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작품을 통해서 기분전환까지 할 수 있어`라고 느끼면서 집중력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의 세계에 더욱 빠져들 수 있다.

 물론 최고의 조탁 예술가는 자연이다. 자연이 만들고 보여준 조탁의 작품들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는 최고 경지의 예술품이다. 그 걸작을 거울삼아 인간만이 창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제자리에 멈춰서는 안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