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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시대
비상시대
  • 이주옥
  • 승인 2017.08.08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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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일찌감치 문자 1통 날아든다. 발송처는 국민안전처다. ‘오늘 오전 11시 폭염주의보 발효.’ 문득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사위를 둘러본다. 순간 더위 한 자락이 더 와락 밀려드는 듯하다. 계절별로 적당한 특성을 가짐으로써 안온한 행복감을 느끼게 하던 한반도는 어느 순간부터 봄, 가을이 확연히 짧아졌고 여름은 폭염, 겨울은 폭설이 난무한다. 전문가들은 아열대 기후로 변해간다고 진단하며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방만함과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은 계절 특성에 따른 기억과 추억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무엇보다 크다. 우리네 조상들은 여름이 더운 만큼 지혜로운 방법으로 물리치면서도 그 안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여름밤, 옛이야기 들려주며 부쳐주던 할머니의 부채, 아스라한 기억 너머에 피어오르는 아이스케키 통의 수증기, 매캐한 모깃불, 밤하늘의 선명한 별, 시원한 계곡물, 우물 속의 플라스틱 김치통, 등목할 때 끼얹어 주며 등을 쓰다듬던 엄마의 손길 등등. 그런 행위들을 몇 차례 소꿉놀이처럼 하고 나면 금세 선선한 가을이 오곤 했다.

 문명은 사람들에게 상상 이상의 이득을 주고 별세계를 선물했다. 사람들은 마치 타임머신이나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환호하고 받아들였으며 맘껏 누렸다. 하지만 이제 그 누림의 끝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에 당황하며 문제점을 되짚어보고 있다. 하지만 왠지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두렵다.

 하루 다르게 수은주는 오르고 이제 우리나라 여름 기온도 40도를 육박하고 있다. 밤새 선풍기나 에어컨은 꺼지지 않고 실외기에서 풍겨 나오는 열기는 온 세상을 뜨거운 사우나로 만들고 있다. 강가나 야외엔 무더위에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온밤 내내 서성거리고 있다. 무더위에 계속되는 가뭄은 농작물을 말려 죽이고 한 번 터진 물난리는 수많은 재산을 거두고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는다. 재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명이 내민 달콤한 사탕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은 벌이라면 너무 유치하고 가혹하지 않을 수 없다.

 도로 위엔 걷는 사람들은 줄고 나날이 자동차만 더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의 물결로 온통 북새통이다. 땅 위나 땅속이나 모두 자기만의 영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이리 밀고 저리 밀며 신경전을 벌인다. 어디나 한산한 곳 없이 무엇인가로 들어차서 숨통을 죄고 있다. 불쾌지수는 높아지는 수은주만큼 널뛰기하고 다치거나 손해 보지 않으려는 경계심에 사람들은 날카로워지기만 한다.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느림이나 기다림은 낙오며 실패가 되는 듯하다. 이유 없이 양보하는 것도 괜스레 바보가 된 것 같아 그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무작정 내달리다가 수시로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앞뒤 재지 않고 차선을 바꾸고 끼어드는 바람에 자동차는 부딪치고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언성을 높인다. 무리하게 끼어들었다 해도 미안함이나 감사의 인사도 없는 무례한 운전자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감사의 인사로 깜박이는 비상등을 바라보며 문득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생각한다. ‘왜 감사는 비상인가.’ 그렇다. 감사마저 비상인 세상이다.

 늘 달려가고 도전하며 생을 소모하는 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일까. 늘 무엇인가 하기를 강요하고 기왕이면 더 앞서가라고 다그친다. 가만히 있거나 잠이 들면 살아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잠들지 않는 세상, 기다리지 않는 시대. 누군가, 어디에선가 보내는 주의보나 경보를 알리는 비상 문자를 받으며 위급상황을 알게 되고 그것에 맞춰 뛰어야 하는 사람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 한 대가 연신 앞으로 끼어들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다급하게 깜박거리는 경고등에 위협을 느낀 운전자는 급히 속도를 줄인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 잠시 후 국민안전처로부터 ‘폭염주의보 발효,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안전한 물놀이를 해라’는 경보 문자가 예외 없이 날아들 것이다. 모든 것이 비상인 시대, 우리는 그 비상사태에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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