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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자찬 묘지명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
  • 이광수
  • 승인 2017.08.13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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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얼마 전 서점에 들렀다가 고전학자 신창호 교수가 쓴 ‘정약용의 고해’라는 책이 눈에 띄어 펼쳐보니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을 해설한 책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위대한 사상가인 정약용이 편찬한 저술은 활자본 154권 76책으로 ‘여유당 전서’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저작 기록은 ‘자찬 묘지명’의 열수전서에 열거한 것을 볼 때 경집, 문집을 합계하면 물경 499권으로 규모와 수량의 방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당대 거유였던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여암 신경준의 저술과 비길 바가 못 될 정도로 방대하다. 그는 정조 임금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 신하였다. 수원화성을 설계한 위대한 건축가이자 서학에 빠져 한때 천주교 신자가 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돼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저작물을 편찬했다. 그가 편술한 저작물들은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조리정연하고 예리했다. 그의 제자들이 목도한 다산에 관한 기록을 보면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날 정도로 고통을 이겨내며 저술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다산의 저술들은 한 인간이 평생 베껴 쓰기에도 불가능한 분량으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역사, 천문, 지리, 농상학, 건축, 기술, 치도, 경세, 외교,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실학자적 면모는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흔히 1표(表) 2서(書)로 통하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다산의 실학사상을 대표하는 경세학 저서이다. 다산은 위대한 유학자였지만 통유학자(通儒學者)로서 수기치인( 修己治人)에 충실했으며, 과학 기술과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영역에 관심과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실질적인 삶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 그의 사상은 결국 서학인 천주학에까지 미쳐 정조 사후 유배의 고통을 당하는 치욕의 삶으로 귀결 됐다. 다산이 겪었던 시대적 아픔과 생의 회한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은 한 인간의 역사기록이자 자서전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명 인사들의 묘지명은 많다. 장미를 사랑한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비명에는 온통 장미 사랑의 말로 치장돼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위트가 넘치는 극작가 버나드 쇼의 비명 역시 무척 해학적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다산의 ‘자찬 묘지명’은 문자 그대로 그의 삶이 축약된 자전적 기록이다. 유배에서 풀려 난 지 4년 되는 61세 환갑연에 쓴 이 고백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선비 아들로서의 열수(한강을 지칭) 정약용, 정조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신하로서의 다산, 천주박해로 강진 유배지로 떠난 다산의 회한에 찬 삶, 유학자 여유당으로서 4서(書) 6경(經)을 읽고 재해석한 기록, 보다 나은 나라를 위한 경세유표, 백성을 아끼고 섬기기 위한 목민심서, 억울한 사연을 살피기 위한 실천을 담은 흠흠신서 등 1표(表) 2서(書)에 대해서 썼다. 끝으로 종장에 자신의 가계와 가족사를 다시 약술하고 지금까지 기록한 자료들을 정리 수습하고자 한다. 또한 죽은 후 집 뒤 정남쪽으로 향해 있는 언덕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까지 남긴다. 다산은 자신이 묻힐 곳의 무덤 형태까지 그어놓고 ‘자찬 묘지명’을 묘지 문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백의 형식을 빌어 ‘자찬 묘지명’을 마무리했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 편의 글로 묶였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육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기)을 안다고 하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만 누구도 이끌어 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몸으로 증명해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겠냐만,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드러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우리는 다산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 마지막 글(종장)에서 환갑을 지난 대유학자로서의 자부심과 신해박해로 인해 겪었던 고행의 지난날을 회ㅌ한에 찬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피땀이 어린 수많은 저작물의 정비정리로 후대의 평가를 기다리겠다는 기대의 심정 또한 이 종장에서 나타내고 있다. 역사는 잠시 잊을지는 몰라도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다. 우리는 다산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을 통해서 역사기록의 준엄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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