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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라’ 눈을 감다
‘즐거운 사라’ 눈을 감다
  • 이광수
  • 승인 2017.09.10 2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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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즐거운 사라’로 필화를 겪었던 마광수 작가가 향년 66세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5년 전인 1995년 6월 16일 대법은 “즐거운 사라는 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문학의 예술적 한계를 벗어났다”고 최종 판시했다. 이후 마 교수는 재직 중이던 연세대에서 퇴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5년 전.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문학의 예술적 한계는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내면 외설이고 안에 숨어서 하면 내설인가? 지금 사회관계망을 통해서 무작위로 노출되는 반인륜적 비도덕적 퇴폐행위의 표현은 과연 외설인가 내설인가. 법은 시대정신의 구현이라고 했다. 이는 법 집행의 공정성과 정의사회구현을 의미한다. 지금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그때의 표현과 그보다 심한 표현이 법규제의 바깥에서 노는 것이 시대정신의 구현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나는 그 당시 소설가로 등단한 지 4년이 됐지만 공직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그 책을 사보지 못했다. 물론 책방에 나온 후 곧 회수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간접적으로 피상적인 책 내용(즉흥적 동침, 동성애, 적나라하게 그려진 자위행위, 스승과 제자가 벌이는 부도덕한 성행위 등)을 신문지상이나 TV 방송을 통해서 봤을 뿐이다. 물론 지금도 윤리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법으로 제재하기에는 당사자들의 제소가 없는 한 불가능하다. 간통죄마저 헌법이 명시한 행복추구권의 보장으로 형사처벌이 사라진 마당이니까. 그러나 성적 표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극공연이나 TV 유료채널을 통해서 더 적나라하게 방영되고 있다. 더욱이 사회관계망을 통해서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퇴폐행위 영상이나 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넘쳐나고 있다.

 마광수 교수가 표현한 내용들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공공연히 노출되는 성적표현과 비교한다면 아무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 25년 전에 비해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가 됐을까. 음성적 매춘행위와 불륜은 음지양지, 지위고하, 사회 각계각층,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매춘행위는 법적으로 강제됐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불황을 모르는 모텔의 성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긴다. 그곳은 ‘즐거운 사라의 방’인가 아님 ‘고상한 사라의 방’인가. 고인의 불행했던 25년을 떠올리면서 명색이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밥벌이 직장 때문이었다고 변명해보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난 1월 고인의 시선을 출간한 모 출판사 대표는 “고인을 구속시키고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한 건 창작의욕을 말살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고상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우리 사회가 그를 이른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는 가운데 사람들(나 자신을 포함해서)이 얼마나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인간의 가면을 쓴 허울뿐인 도덕 놀음에 불과한 변명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부부답지 않게 살고(각방 쓰기, 별거, 졸혼 등),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싱글들의 변명을 듣노라면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의 한계가 모호해짐을 실감한다. 욜로(YOLO)라는 미명 하에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잘사는 건지, 일반적 사회규범에 따르며 사는 것이 잘사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나마 이 세상의 윤리 도덕을 지탱해준 정신적 지주였던 종교마저 자기 도그마에 빠져 세인의 외면을 받는 세상에, 한 인간의 문학적 표현이 사회 도덕 규범의 일탈이라고 단죄한 사법적 판단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 줄 것인가. 세상을 향한 모든 원망과 고통을 가슴 속에 묻고 삭이지 못한 채 그는 사라져 갔다.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마광수라는 한 인간의 가식 없는 예술적 표현이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나 역시 신문연재 통속소설을 책으로 발간했는데 다소 야한 표현 때문에 출판사가 경고장을 받았다. 문인다운 문인이 희귀한 존재로 여겨지는 가식적인 문인 시대에 고인의 죽음이 남긴 응어리진 메아리가 가슴을 친다. 불의에 맞선 사회정치적 횃불은 끊임없이 타올랐지만 문학과 예술표현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한 문화예술인들의 용기 있는 저항은 현실타협이라는 미명 하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문학정신과 시대정신이 따로 노는 이율배반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문인들은 그의 죽음이 던지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 봐야겠다. 그의 유작 ‘추억마저 지우랴’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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